- 2007년 8월 중순 신용 경색, 2008년 금융 위기 발생
- 은행들은 구제금융으로 겨우 파산 모면
- 평범한 사람들의 고통 (중국 2천만 명 실직, 인도 1천만 명 해고 위협, 곡물가 폭등, 18개월동안 미국인 300만 가구 집 빼앗김)
- 2008년 경제 위기는 새로운 특징이 아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으로 현재 자본주의 형태가 확립된 이후 위기는 항상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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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경제학은 경제 위기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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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1930년대 대공황과 1990년대초 일본의 위기를 예상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 전의 왕성한 성장기를 보며 '새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국제결제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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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대공황을 이해하는 것은 거시경제학의 성배" - 벤 버냉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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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경제학을 지배한 '신고전학파', '한계효용학파'의 가정 자체가 이런 결함을 내재한다. 이들은 시장이 어덯게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키는지 보여주는 것이 자신의 과제라고 여겼다. 이것은 경제위기가 가능하지 않다고 전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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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조차도 정부의 개입을 통해 균형 모델이 잘 작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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슘페터는 자본주의의 가장 긍정적인 미덕인 역동성과 균형 모델이 양립할 수 없다며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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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 경제 이론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시장 체제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들의 관점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정설 이론은 그들의 폭리 행위를 공익에 기여하는 것이라 보고 뭔가가 잘못돼도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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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케인스주의자들의 주장은 국가 개입을 강화해 체제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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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는 인간 활동의 산물이다. 시장은 인간의 다양한 활동이 모인 것인데 그것이 모종의 체제가 되어 인간을 지배하고 불행한 방향으로 세계를 몰고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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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자본주의는 대중을 그들 자신의 노동에 비인간적으로 예속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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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어바흐: (소외) 종교는 인간의 창조물이지만 사람들은 종교가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도록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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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소외) 인간 노동이 부를 만들지만 자본주의에서 부는 인간 노동을 지배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많은 노동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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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는 어떻게 형성됐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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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는 체제를 반대하는 세력을 어떻게 만들어 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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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역사적 산물
- 추가로 참고해 볼 글: 크리스 하먼의 <인터내셔널 소셜리즘> 경제학 관련 논문 15편, 크리스 하먼의 <경제 위기를 설명한다>
- 경제 변화를 설명할 때 각국 정부, 경제 단체, OECD, 유엔무역개발회의, WTO, 세계은행, IMF 등 국제 기구가 제공하는 통계 정보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수치들 중 일부는 중요한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 특히, 경제 성장에 관한 수치는 그렇게 명확한 것이 아니다.
- 인간 노동 중 많은 부분(가사노동 등)은 시장에서 매매되지 않는다.
- 흔히 제시되는 공식 수치는 금융 서비스도 생산량으로 계산해 실제 성장률을 과장하기도 한다.
- 1인당 생산량은 인간의 복지와 등치될 수 없다. 생산량이 계급 사이에 균등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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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경제체제의 특징: 재화를 사고파는 것(상품화)이 핵심 메커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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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의 부는 엄처난 상품 덩어리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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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예외들(무상 의료·교육 시스템 등)도 점차 상품화 압력에 시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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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생산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려 한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 데이빗 리카도, 칼 마르크스
개념 | 정의 | 특징 | 영향받는 법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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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가치 | 특정한 물건의 유용성 | 상품의 물리적 속성에 따라 제약되므로 상품 자체와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상품은 그 자체가 사용가치다. 사용가치는 그 유용성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노동이 필요한지와는 무관하다. 사용가치는 교환가치처럼 나눌 수 없다. | 물질세계의 법칙 |
교환가치 | 한 종류의 사용가치가 다른 종류의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비율 | 교환 비율은 때와 장소에 따라 변화한다. 교환가치는 한없이 나눌 수 있다. | 물건들이 교환가치로서 서로 관계 맺는 방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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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가치와 교환가치는 서로 다른(흔히 모순된) 논리에 따라 움직인다. 상품생산 체제에 대한 분석을 할 때 이 둘을 구분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상품생산 경제는 교환가치의 움직임처럼 부드럽게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교환가치는 유동성을 제한하는 물리적 속성이 있는 사용가치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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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거리: 스미스의 개념과 마크르스의 개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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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속성이 서로 다른 물건들의 교환가치를 비교할 수 있는 이유는 물건들이 모두 인간 노동의 산물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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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달려 있다.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특정한 구체적 노동 행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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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구체 노동은 상품생산 사회의 교환을 통해 '동질적인 사회적 노동의 일부'(추상노동)로 변환된다. 이 추상 노동이 '가치의 실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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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경제학의 한계효용 개념은 사용가치에 대한 사람들의 주관적 평가에 바탕을 둔다. 반면 마르크스는 가치를 객관적인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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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는 사회적 총노동의 일부가 상품속에 구현된 것이며, 그 가치가 얼마인지는 시장에서 상품들의 상호작용 결과로 나타난다. 개별 구성 요소는 개별 노동이 다른 구성 요소의 노동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 걱정하게 된다. (가치법칙의 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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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는 고정불변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기술과 생산방법이 도입되면 특정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필요노동량과 교환가치가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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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뜻 이해가 안 되는 결론": 생산성 향상은 물건의 교환가치를 떨어뜨린다.
- 화폐: 특정 상품 하나가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는 데 쓰이게 된 것 (일반적 등가물)
- 지폐(법정화폐): 다양한 거래에서 금화 대신 지폐를 사용할 수 있다. -> 사람들이 상대방이 어떤 '지폐'를 받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면 금화를 전혀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
- 상품 물신성: 상품생산은 사람들의 현실 인식을 왜곡한다. 사람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관계는 물건들(생산물)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로 보이게 된다.
- "돈의 힘"은 인간의 노동에서 나온 것이지만 독자적인 것처럼 생각된다.
- "시장의 필요"는 시장이 인간들의 구체적 노동 행위를 서로 연결하는 방식 이상의 것으로 생각된다.
- 이런 신비주의는 사람들이 사회악을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든다. (소외)
- 자본주의는 또한 생산을 통제하는 힘이 소수의 손에 집중된 사회이기도 하다.
- 생산수단을 갖지 못한 대중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노동능력을 판매해야만 한다.
- 노동생산물은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자들이 가진다. 이 노동생산물의 가치 중 일부는 임금으로 노동자에게 돌아가고, 일부는 원료비, 생산수단의 감가상각비로 쓰이고, 나머지는 생산수단 소유자가 가져가는 이윤의 기초(잉여가치)가 된다.
- 이윤은 생산에 필요한 토지·도구·원료가 사회 일부 집단의 사유재산이 될 때 생겨난다. 이 집단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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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스미스가 뒤섞어 서술한 '노동의 가치'의 두 의미를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의 가치로 구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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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력의 가치(임금): 노동자가 지신의 생계와 가족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노동력 재생산 비용. (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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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가치(노동생산량): 임금을 받고 고용된 노동자가 수행하는 노동량. 노동자는 노동력의 가치보다 더 많은 양의 노동을 한다. (v +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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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철칙설 비판) 노동력의 가치는 최저 생계 수준에 그치지는 않는다. 다음 세대 노동력 생산비용, 역사적·도덕적 요인 등이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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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노동력의 차이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고 감춰짐으로써, 착취는 만민 평등, 인권을 바탕으로 하는 사법제도와 양립할 수 있다. 표면에 보이는 법률적 평등은 이면의 실질적 불평등을 은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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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는 생존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자본가 계급을 떠날 수 없다. 노동자는 개별 부르주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 전체에게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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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생산수단을 통제하는 사회집단이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일해야만 먹고 살 수 있도록 강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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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은 사물이 아니라 관계다.
- 기업이 임금 대비 잉여가치의 비율을 높이는 두 가지 방법
- 노동시간을 절대적으로 늘리는 방법
- 물리적 한계 있음
- 지나친 노동시간 연장은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트리기도 함
- 역사적으로 노동계급 반발로 노동시간은 점차 줄어들어 왔음
- 노동력 재충전 비용을 충당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시간의 비율을 줄이는 것
방법 | 방식 | 효과 |
---|---|---|
새로운 기계 도입 | 노동력 비용충당부분이 일정한 채로 생산성이 향상되어 노동시간 중 노동력 비용충당부분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 | 단기적 처방일 뿐이다. 장기적으로 다른 자본가들도 새 기계를 도입함에 따라 해당 제품 생산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이 감소, 단기적으로 발생했던 초과이윤은 사라진다. |
소비재 산업·농업의 생산성 향상 | 노동력 재생산 비용(임금의 기준)이 낮아진다. | 상대적 잉여가치를 증진시키는 효과 있다. |
노동강도 강화 | 고정된 시간동안 노동자가 더 열심히 일하도록 하여 생산성을 늘린다. | 설명 없음 |
- TODO: 의문: 노동강도 강화는 노동시간을 절대적으로 늘리는 것과 마찬가지 효과를 내지 않을까?
- 사회적 생산과 자본주의적 전유 사이의 모순(엥겔스): 생산은 사회 전체의 분업과 협업을 통해 이뤄지므로 사회적 성격이 있다. 그러나 생산의 결과인 잉여가치는 자본가들만 향유하므로 그 취득은 사적 성격이 있다. 이 모순은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적대', '공장에서의 계획성과 사회에서의 무정부성 사이의 대립'을 낳는다. 그리고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뤄지지만 그 결정은 소수가 내리며, 그 결정을 내리는 소수는 서로 상의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경쟁한다. (김수행 참고함)
- 상품생산 세계는 생산자들끼리 서로 경쟁하는 세계다. 자본가들은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다른 자본가를 앞질러야 한다는 압박 때문에 설비와 기계를 끊임없이 개선할 수밖에 없다.
- 자본주의는 임금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일 뿐 아니라 강박적 축적 체제이기도 하다.
- 자본주의는 노동자뿐 아니라 자본가의 행동도 제약한다. 노동자를 착취하지 않는 착한 자본가란 존재할 수 없다.
개념 | 식 | 설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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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물의 가치 | c+v+s | 생산도구·원료에 포함된 가치(c)가 이전된 양, 노동자의 노동중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드는 양(v), 그 이상의 노동만큼 만들어낸 잉여가치(s)가 포함된다. |
가변자본 | v | 자본가가 노동력에 투자한 자본. 노동력은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를 창출해 가치를 증식한다. |
불변자본 | c | 자본가가 생산설비, 원료 등에 투자한 자본. 생산설비는 여러 차례의 생산순환에 조금씩, 원료는 한 차례 생산순환에서 가치가 이전된다. |
잉여가치 | s | 가변자본에 의해 증식된 가치. 노동자의 노동(v+s) 중 임금으로 지급되는 부분(v)을 제외한 부분. 자본가가 가진다. |
착취율 | s/v | 노동자가 자신을 위해 지출하는 노동시간 대비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제공하는 노동시간의 비율. |
이윤율 | r = s/c+v | 총투자대비 잉여가치의 비율.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가변자본만이 아니라 총투자대비 이윤의 비율이 중요하다. |
자본의 유기적 구성 | c/v | 불변자본 대비 가변자본의 비율. 생산도구·원료에 대한 투자와 노동력에 대한 투자를 나타냄. 이윤율에 영향을 미친다. 산업·시대마다 유기적 구성은 상이하다. |
- 자본주의적 생산(노동자 착취)이 가능하기 위해 소수 특권적 집단이 무력을 써서 대중의 생산수단 통제권을 빼앗는 일이 필요했다. 자본주의 생산의 성장 조건을 창출한 이 과정을 자본의 시초 축적이라 한다.
- 예)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인클로저 운동, 스코트랜드의 사유지 '청소', 식민지의 토지소유권 정책 등.
- 소수가 생산수단을 대중의 손에서 빼앗아 독점하면 다수의 대중은 생계 수단을 직접 이용할 수 없게 되고 생산수단을 독점한 소수는 그들에게 고된 노동을 강요할 수 있게 되어 부를 축적하게 된다.
- 일단 자본주의가 확립되고 나면 굳이 국가가 개입하거나 무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자체의 경제적 메커니즘 때문에 생산수단과 사람드르이 분리 과정이 더욱 촉진된다.
- 자본가가 부를 약탈하는 것을 모두 시초 축적이라 부르는 것은 틀렸다. 무력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필요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만들어낸 과정이 시초 축적이다.
- 신고전학파: 각각의 생산요소는 그 한계생산물만큼 보상을 받는다고 주장
- 비판: 생산수단과 원료 자체도 생산된 것이다. 그것은 과거 인간 노동의 산물(죽은 노동)이다. 그것은 생산과정에서 그대로 이전될 뿐이다.
- 신고전학파는 노동이 생산수단을 만들어낸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 신고전학파는 정태적 경제관과 동시성을 가정한다. 자본주의는 결코 정태적이지 않다. 생산은 항상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 예) '가격 신호'는 생산이 끝날 때 사람들이 어떤 상품을 원할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생산이 시작되기 전에 어떤 상품을 원했는지를 알려 줄 뿐이다.
- 마셜: "시간은 경제학의 최대 난제들의 근원", "생산량, 생산방법, 생산비의 변화는 항상 상호작용하면서 상대방을 변화시키기 때문"
- 신고전학파는 효용의 측면에서 가치론을 정립했다.
- 효용은 사람들이 느끼는 주관적 유용성을 바탕에 둔다.
- 효용 개념은 한 사람이 얻는 효용과 다른 사람이 얻는 효용을 측정하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해결하지 못한다.
- 효용 개념은 일부 개인의 선호도가 왜 다른 개인의 선호도보다 더 중요한지 설명해야 한다. 그러려면 왜 일부가 다른 이들보다 더 부유한지를 설명해야 하는데, 그 차이는 효용 이론이 외면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와 동역학과 관계가 있다.
- 더 나중의 신고전학파 이론가들은 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아예 폐기해 버렸다. 그런데도 주류 경제학 교육은 "한계효용"을 핵심 개념으로 가르치고 있다.
- 사람들은 뭔가를 사용하거나 팔고 싶어서 돈을 주고 산다. 그러나 가격을 결정하는 것은 그런 용도나 용법이 아니다.
- 신고전학파는 생산과정에서 사용된 자본의 가치로 한계생산량을 측정한다고 주장. 그런데 그 자본의 가치를 정의할 때도 한계생산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순환 논리의 오류.
- 정설 경제학은 경제학이 다뤄야 할 주제들(빈부격차, 잉여상품이 절실한 수요처에 분배되지 않는 이유, 호황과 불황의 원인 등)을 설명하지 않고, 그저 그냥 지금 어떤 것이 구매되고 어떤 것이 판매되고 있다고 말할 뿐이다. 루돌프 힐퍼딩과 니콜라이 부하린은 한계효용파를 비판하며 이런 점을 지적했다.
- 당시 비주류인 '케임브리지학파'도 한계효용학파의 이런 맹점을 비판했다.
- 마르크스의 관점은 신고전학파의 주관적이고 정태적인 관점을 피할 수 있었다.
- 객관성: 특정 시점에 체제 전체에 존재하는 기술 수준으로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을 기초로 삼는다. 마르크스는 개인들의 평가가 아니라 다수 자본이 서로에게 가하는 압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런 압력이 작용하는 가치법칙에 따라, 자본가는 상품가격을 주관적으로 책정할 수 없다.
- 동태성: 자본들의 관계는 고정불변하지 않다. 다수 자본은 시간을 두고 상호작용한다. 한 자본이 신기술을 도입해 시장을 잠식하더라도 곧 다른 자본들도 기 술을 채택하여 신기술에 따른 이점은 사라지고 만다. 가치법칙은 시간을 두고 서로 압력을 가한 결과로만 작용한다.
-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한 순간만 포착해 보면 가치법칙과 어긋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을 허용한다면 자본 간의 경쟁 압력 때문에 그런 차이가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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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마다 투자 대비 노동의 비율(v/c+v)이 다르다. 그런데 각 산업의 이윤율(s/c+v)은 그와 똑같은 차이가 나지 않는다. 임금이 비슷한 수준이고 부문들의 착취율(s/v)이 거의 똑같은 수준일 때조차 그렇다. 노동가치설에 따르면 v와 s는 비례해야 하므로 뭔가 잘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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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는 이를 '전형 문제'라 부르며 동태적 모델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 체계는 아래와 같다.
- 이윤율이 낮은 A 부문의 기업은 자본을 다른 데로 옮긴다.
- A 부문의 생산량이 줄어들어 그 가격이 실제 노동가치보다 높아진다.
- A 부문의 제품을 생산에 투입하는 다른 부문의 기업들은 (직접 투입물로 쓰든, 노동력 재생산 비용으로 쓰든) 실제 가치보다 비싼 가격을 치른다.
- 이윤율이 더 높은 부문의 기업들은 이윤율이 더 낮은 부문의 기업에게 잉여가치의 일부를 넘겨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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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자본가계급 내에서 잉여가치 재분배를 통해 이윤율의 균등화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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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더라도, 여전히 상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이 변할 때마다 상품의 가격도 변화한다고 볼 수 있다. 이윤율이 균등화되는 것은 이미 생산된 잉여가치가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자본가에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체제 전체에서 가치의 흐름이 방해받을 때(대규모 규제 등) 부문별 이윤율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 뵘바베르크(한계효용학자) 등: 생산이 끝난 뒤의 자본 간 가치 이동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최종 가격을 설명할 수 없다. 생산에 들어간 투입물(생산수단, 노동력)의 가격이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방법은 가격으로 가격을 설명하는 것이지, 노동가치로 가격을 설명하는 게 아니다.
- 폰 보르트키에비치(리카도주의자) : 단순재생산 모델을 이용한 연립방정식으로 노동가치에서 가격을 추론하는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 노동가치를 가격으로 전형하는 데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면 마르크스가 당연하게 여긴 '총계 일치' 명제 중 하나가 틀렸다고 봐야 한다. 총가격이 총가치와 일치하지 않거나, 총이윤이 총잉여가치와 일치하지 않는다.
- 안와르 셰이크(마르크스주의자): 총가격 = 총가치, 총이윤 = 총잉여가치 명제 성립 가능하다는 증명을 시도. 그러나 한 생산순환에서 다음 순환으로 넘어갈 때 착취율의 변화를 허용하는 문제가 있음.
- 그 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 폰 보르트키에비치, 안와르 셰이크 등의 근본적 가정: 동시성에 전함으로써 마르크스의 견해를 올바르게 방어할 수 있었다.
- 연립방정식의 방법은 생산 투입물 가격이 산출물의 가격과 같아야 한다고 가정한다. (생산 투입물 가격이 생산 시작 시점과 생산 종료 시점과 같아야 한다고 가정한다는 뜻인 듯.)
- -> 그러나 산출물은 투입물이 생산에 들어간 후에 생산된다. A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투입물 가치는 이후에 B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투입물의 가치와는 다르다. (노동생산성 향상 등의 이유로 가치는 변동하기 때문.)
- 이에 대한 비판으로 생산에 들어가는 투입물은 여전히 가치가 아니라 가격으로 표현되므로, 가격을 노동가치로 환원하면 무한 재귀에 빠진다고 한다.
- -> 그러나 투입물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투자는 그 투입물 자체가 생산됐을 때의 노동가치로 분석해야 하는 게 아니다. 생산순환을 살펴보는 출발점은 그 생산을 시작하는데 필요한 투입물의 화폐가격이다. (시(time)점의 문제)
- 천체의 궤도를 계산하기 위해 빅뱅으로 거슬러갈 필요는 없다. 그 천체에 미치는 현재 운동량을 살펴보면 되는 것이다. 현대 동물을 연구하기 위해 생명체가 처음 출현한 때로 거슬러 갈 필요는 없다.
- 굴리에모 카르케티는 이런 비판이 타당하려면 마르크스의 전형 절차뿐 아니라 모든 사회과학이 파산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 숙련노동이 가치 창출에 기여한 정도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 마르크스는 숙련노동을 그저 단순노동이 강화된 것, 즉 몇 곱절로 늘어난 단순노동으로 계산하면 된다고 봤다. (labor * skill_level_multiplier)
- 숙련노동자와 미숙련노동자가 같은 일을 하고, 단지 그 처리속도가 다를 때는 이 설명이 적합하다. 숙련노동 1시간은 사회적 필요노동 1시간보다 더 가치가 있을 것이고, 미숙련노동 1시간은 그보다 가치가 적을 것이다.
- 숙련노동을 숙련노동자가 아니면 해낼 수 없어, (미숙련노동 * 양)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경우에 문제가 발생한다.
- 그러나 가치법칙이 시간을 두고 작용한다고 보면 이 이론적 문제도 사라진다.
- 기술 발전으로 새로 등장한 숙련노동만이 할 수 있는 생산물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을 측정할 객관적 척도가 없다. 이들은 노동시간과 전혀 관계 없는 보수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은 체제의 나머지 부분에서 기술을 독점적으로 통제하는 자에게 가치가 흘러 들어가는 현상이다.
-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 국면일 뿐이다. 체제의 다른 부문의 자본가들도 신기술을 도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 자본가들이 신기술의 혜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다.
- 새로운 노동자들을 훈련시켜 신기술을 습득하게 하기. 이것은 한 노동(훈련?)을 통해 숙련 작업을 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력을 창출하는 것이다. 숙련을 마친 뒤에 가능해진 최종 노동은 합성 노동(노동자의 현재 산 노동 + 그 노동력에 숙련 기술로 체화된 죽은 노동(훈련?))이 된다.
- 노동자들에게 실습 훈련을 시켜 노동력 속에 추가 요소를 직접 확보하기. 이 때 훈련 비용을 노동자들 자신에게 맡길 수도 있고 국가에게 전담시킬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죽은 노동이 개선된 노동에 체화되고 그것이 다음에 노동생산물로 이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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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흐름을 무시하면 독점적 기술의 가격은 효용에 따라 책정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다른 자본가도 신기술을 얻기 위해 노력하므로 기술 독점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면 이런 노동도 일정 비율의 다른 노동으로 환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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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련노동이 시간을 두고 미숙련노동으로 환원되는 과정은 자본주의 축적의 끊임없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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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케디: 탈숙련화를 통한 (노동력의) 가치 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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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법칙은 개별 자본간의 관계를 고정불변으로 확정하는 공식이 아니라 개별 자본들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압박하는 것으로 이해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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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개념을 시차적 변화를 무시하는 정태적 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마르크스의 개념은 여러 비판을 받았지만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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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시대에는 10년에 한 번 꼴로 경제 위기 발생. 1810년~1920년 사이 110년간 미국에서 경제 위기 15회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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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주류 경제학은 경제 위기를 부정. (세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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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의 법칙: 판매자 = 구매자이므로, 공급이 스스로 수요를 창출한다. 공급과 수요는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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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현실에서는 공급과 수요가 일치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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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전학파 창시자들은 현실의 경제에서는 호황과 불황이라는 '경기순환', '경기변동'이 있음을 인정. 그 원인을 외부 요인으로 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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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번스: 태양의 흑점 -> 기후 영향 -> 농업 생산성 -> 경기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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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 수요·공급과 가격의 불일치가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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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경기순환은 주기적 조정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것. 순환 자체는 위기 아님. 폭력적이고 장기적인 변동은 외부 요인 탓. (안와르 셰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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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물적 경기변동 이론: "경기순환은 하나의 추세선을 중심으로 추계적으로 진동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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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경제학은 여전히 자신이 신봉하는 확고한 법칙 체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 마르크스: 전반적 과잉생산 위기의 가능성이 자본주의 본질 자체에 있다.
- 세의 법칙 반박: 판매와 구매가 동시에 일어나는 물물교환경제에서는 공급 = 수요 맞다. 그러나 교환에서 화폐가 매개될 경우 판매와 구매가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화폐는 가치 저장 수단이기도 하다. 누군가가 상품 판매로 얻은 돈을 소비하지 않고 저축할 경우 체제 전체에서는 생산된 상품을 모두 구매할 돈이 모자랄 것이다. "누군가가 구매하지 않으면 아무도 판매할 수 없다. 그러나 판매했다고 해서 당장 구매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 경쟁적 축적으로 자본가는 때문에 상품생산량을 최대화하려 하고 동시에 임금을 억제해서 이윤을 극대화하려 한다. 그런데 임금은 상품 구매력의 중요한 일부다. 생산은 대중의 소비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 이 설명만으로는 과소소비론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설명만 한 것이 아니다.
- 과소소비론: 노동자가 착취당하기 때문에 시장의 규모가 제한되고 경제 위기가 일어난다는 주장. 과소소비론적 마르크스주의는 케인스주의와 비슷하다. 불황이 닥치려 할 때 국가가 개입해서 소비를 늘리면 경제 위기를 피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 마르크스의 설명은 과소소비론과는 다르다. 마르크스는 생산수단이 되는 상품의 이중적 성격(가치이면서 동시에 사용가치이기도 함) 때문에 경제 위기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생산재의 성격 | 다른 생산재와의 연결방식 | 작용 원리 | 예 |
---|---|---|---|
사용가치 | 물리적 상호작용으로 연결 | 물리학·화학·생물학 등의 법칙 | 직물 기계 생산에는 철강이 필요. 철강 생산에는 석탄이 필요. |
가치 | 구매와 판매로 연결 | 각각의 생산 행위가 각 기업 소유자들이 가져가는 가치의 양을 증대시켜야 함 | 석탄 회사는 철강 회사에 석탄을 판매. 철강 회사는 직물 회사에 철강을 판매. |
- 이 완전히 다른 두 조건이 충족될 때만 생산과 최종 소비를 연결해주는 길고 복잡한 사슬이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 이 두 조건이 서로 어긋나게 되면: 생산의 확대 -> 원료 공급에서 병목현상 -> 잉여가치가 완제품·중간재 생산 자본에게서 원료 생산 자본가에게 이전됨, 노동력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임금 인상 압력 발생(명목임금에 한해. 물가 인상으로 실질임금은 인상되지 않음.)
- 자본가들이 적어도 체제 전체의 평균 수준만큼 이윤을 얻어서 다른 자본가들과 경쟁할 만하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생산은 이뤄지지 않는다.
- 자본가는 그런 이윤을 얻기 위해 선진적 기술을 도입해 노동자의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쪽으로 끊임없이 생산을 재조직해야 한다.
- 그러나 모든 자본가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평균적 노동량은 계속 감소한다. 따라서 상품의 가치도 떨어진다.
- 체제 전체에서 상품 생산량은 늘어나는 경향이 있는 반면, 개별 상품의 가치는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 따라서, 선진적 기술의 경쟁적인 도입은 위에서 말한 체제 작동에 필요한 두 조건(생산의 물리적 조직, 가치의 흐름 지속)을 둘 다 변화시킨다. 그런데 두 조건의 변화는 자동으로 조화를 이루지 않는다.
- 한 기업이 생산을 시작할 때 구매한 물리적 설비 가격은 그 당시의 설비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생산이 이뤄지고 있을 때 다른 부문의 생산성 향상으로 그 설비의 가치가 떨어지고, 그 설비를 이용해 생산하는 제품의 가치도 떨어진다.
- 기업은 수익성을 계산할 때 설비의 현재 가치가 아니라 과거의 설비를 구매하는 데 든 비용을 따진다. 기업은 초기 투자와 비교해 이윤을 남겨야 한다. 호황기의 특징인 급속한 축적률은 생산물의 단위당 가격을 떨어뜨리고, 기업 입장에서는 호황 초기의 투자와 비교해서 남겨야 할 이윤이 타격을 입게 된다.
- 호황이 진행되면 생산 설비의 가치가 떨어지고, 상품의 가치가 떨어지고, 원료비(가격과 가치의 차이)가 인상되고, 임금이 인상된다.
- 일부 기업들이 이윤이 줄어들어 신규투자를 중단한다. 이 기업에 생산재를 공급하던 다른 기업들의 상품에 대한 수요도 감소한다.
- 상품 수요가 낮아진 기업들은 가격을 가치 이하로 낮춰 매출을 유지하려 한다. 가격 인하로 인한 이윤 감소를 벌충하기 위해 노동자를 해고하고 투자 계획을 취소한다. (2로 가시오)
- 경기 수축 국면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 일부 기업이 파산하면 다른 기업들이 공장과 설비를 헐값에 사들인다.
- 노동력 수요가 적어지므로 기업들이 노동자들에게 임금 삭감을 강요한다.
- 살아남은 기업이 평균보다 높은 이윤을 기대할 수 있는 때가 결국 찾아오고, 그 기업은 신규 투자에 착수한다.
- 경쟁으로 신규 투자 수준이 새로운 기계·부품·원료의 기존 생산량을 일시적으로 초과하게 된다.
- 경기 하강 국면의 '과잉생산'은 상승 국면의 '과소생산'으로 바뀌고, 불황기에 가격이 가치 이하로 떨어졌듯이 이제 호황기에는 가격이 가치 이상으로 올라간다.
- 경기순환은 개별 자본가나 정부의 잘못된 결정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가치가 가격으로 표현되는 방식 자체의 결과다.
- 경기 확장 국면, 경기 수축 국면의 기간은 신용이 어떤 구실을 하느냐에 따라 길어지거나 짧아진다.
-
자본은 생산과정을 통과하면서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한다.
-
화폐에서 시작해, 화폐는 생산도구, 원료, 노동력을 구매하는데 쓰이고, 이 상품들은 다른 상품을 생산하고, 이 상품은 판매되어 처음보다 증가한 화폐가 된다.
-
화폐(M) -> 상품(C: 생산도구, 원료, 노동력) -> 상품(C
: 생산물) -> 화폐(M
) -
하나의 생산순환은 다시 다음 생산순환으로 이어져 반복된다.
-
그런데 말입니다,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이 형태들(화폐, 상품, 생산수단, 노동력)이 모두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
화폐, 상품, 생산수단이 지속적으로 공급돼야 생산이 중단되지 않는다. 따라서 생산순환은 화폐자본의 순환, 생산자본의 순환, 상품자본의 순환으로 구성된다.
-
(신용, 은행의 발달) 생산 단위가 작은 자본주의 초기에는 생산자본가가 어느 정도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개별 기업의 규모가 커지자 자본가는 자신이 가진 자본만으로 필요한 생산수단의 비용을 모두 충당하기 어려워져 다른 자본가에데 돈을 빌려야 했다.
-
(도·소매상) 시장의 규모가 커지자 자본가는 도·소매상에 의존해야만 상품을 판매할 수 있게 됐다.
-
신용은 자본주의 생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부(화폐자본의 순환을 매개·촉진)가 됐다. 자본주의 생산이 커질수록 신용의 사슬(차입과 대출의 사슬)은 더 길고 복잡해졌다.
자본의 부문 | 구실 | 이윤 |
---|---|---|
생산자본 | 상품을 생산함 | 상품 생산으로 잉여가치를 얻음 |
도·소매상 | 생산자본이 생산한 상품을 판매함 | 생산자본의 잉여가치 일부를 이전받음 |
은행 | 화폐자본을 조달해 다른 자본에 빌려줌 | 생산자본의 잉여가치 일부를 이전받음 |
- (귬응 시스템의 출현) 생산자본가는 고정자본을 몇 년에 한 번씩만 갱신하면 되면서 생산에서는 끊임없이 이윤이 흘러나오므로, (고정자본을 갱신하기 전에는) 다른 자본가에게 거액을 대출해줄 수 있다. 당장 재투자할 생각이 없는 생산자본가들은 당장 투자하고 싶지만 자금이 없는 자본가에게 자금원이 된다. 서로 다른 생산자본가를 중개하는 기관들의 네트워크로 금융 시스템이 출현한다. (조세수입과 지출이 불균형해 돈을 빌리거나 빌려주는 국가도 여기에 끼어듬)
- (금융기관의 이윤) 금융기관을 운영하는 자들은 생산자본가와 마찬가지로 이윤을 최대한 많이 얻으려 한다. 금융자본가의 이윤은 생산에서 직접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본가에게 돈을 빌려준 대가로 생산자본의 이윤 일부를 이자로 받는 데서 나온다. 그래서 이윤율과 이자율을 혼동할 수 있다.
- 주류 경제학은 흔히 이자율(금리)과 이윤율을 혼동한다. 그러나 이자율과 이윤율은 다르다.
개념 | 결정방식 | 호황국면 | 불황국면 |
---|---|---|---|
이윤율 | 생산과정에서 투자와 잉여가치의 비율 | 높음 | 낮음 |
이자율 | 대출 가능한 자금의 수요와 공급 | 하강 압력 | 상승 압력 |
- 호황기(이윤율▲)에는 생산자본가의 이윤(대출 자금 주요 원천)이 많아지므로 대출 자금의 공급이 많아져 이자율이 낮아진다.
- 불황기(이윤율▼)에는 자금 차입을 원하는 생산자본가가 늘어난다. 따라서 이자율 상승 압력이 커진다. (신용도가 낮아져 대출 공급은 주는 반면 상환 압박이 크므로 대출 수요는 커진다.)
- 국가의 차입·대출, 국경을 넘나드는 자금 흐름도 이자율에 영향을 주지만 실물 생산이 금융 부문에 가하는 압력을 제거할 수는 없다.
(참고) 김수행의 설명
이윤율과 이자율을 결정하는 요소는 서로 다르다. 이윤율과 이자율이 동일한 방향으로 변동한다고 볼 수 없다.
이윤율은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하는 잉여가치를 총 투자자본으로 나눈 것이므로 이윤율의 상승·저하는 노동시간, 노동생산성, 노동강도, 그리고 생산 결과물이 시장에서 얼마나 잘 판매되는가와 연관된다. 따라서 이윤율은 호황일 때 상승하고, 불황일 때 저하한다.
반면, 이자율은 자금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자금에 대한 수요가 많은 가난한 지역에서는 이자율이 높다. 특히 경제위기 국면에서는 어떻게든 자금을 구해야 하므로 이자율이 가장 높은 수준으로 상승한다.
따라서 호황일 때는 이윤율은 높지만 이자율은 낮고, 경제위기 국면에서는 이윤율은 매우 낮지만 이자율은 매우 높다.
<청소년을 위한 국부론>
- 금융기관은 당장 갖고 있는 자산보다 더 많이 대출해 줄 수 있다. (차입 자금을 당장 갚아야 하는 것이 아닌 경우. 부채 상황 만기 전에 대출을 회수해서 갚을 수 있을 거라 믿고)
- 생산 부문에서 생산량이 증가하는 동안은 계속 보유자산보다 많은 대출을 할 수 있다. 대출을 늘리더라도 생산자본에 대한 대출이 투자를 늘리고 이윤도 더 많이 생산돼서 그 이윤에서 이자와 대출금을 회수될 수 있기 때문이다.
- 그러나 금융 이윤 추구 노력으로 마침내 실물 생산이 성장해도 은행 빚을 갚을 수 없게 되는 순간이 항상 찾아온다.
- 하이먼 민스키: 헤지 금융(정상적 수익 내는 단계) -> 투기 단계 -> 민스키 모먼트(빌려준 돈을 전혀 되찾을 수 없는 순간) -> 폰지금융(피라미드식 자금 조달이 유행)
- 마르크스: "신용 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확립을 촉진하지만" 그와 동시에 "자본주의 생산의 동기, 즉 다른 사람의 노동을 착취해서 재산을 늘리는 일을 가장 순수한 형태의 도박과 사기로까지" 발전시킨다.
- 금융은 생산과정이 그 자본주의적 한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그러면 그 결과가 다시 생산 자체에 영향을 미쳐 "과잉거래, 과잉생산, 과잉신용"이 나타난다.
- 금융기관은 생산자본에만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 대출(특히 부동산 담보 대출), 증권시장에서 주식 매입을 하기도 한다. 이 때 금융기관은 현행 금리에 따른 이익을 기대한다.
- 그런데 이것은 자본축적 과정에 결코 기여하지 않는다. 그런 이익은 생산부문의 상황에 기생적으로 의존한다.
- 마르크스는 금융자본을 "가장 물신적인 형태의 자본 관계"라고 설명하면서 "허구적 자본"이라고 불렀다. 금융은 자본이 스스로를 창출하는 이자의 신비한 원천으로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 지급준비금
- 레버리지 효과
- 뱅크런
- 신규 투자의 확대·축소 사이클은 대출의 확대·축소 사이클을 수반한다. 그러나 두 사이클이 서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 호황 국면: 호황 시작, 신용 확대 -> (경쟁적 투자로) 투자량 > 이윤에서 나오는 자금 -> (대출 자금 공급 부족) 금리 인상 -> 이윤 잠식 -> 위기 국면을 향한 압력이 가중됨
- 불황 국면: 기업과 은행은 대출을 꺼림. 기업의 차입 필요성 커짐. 빚을 갚을 이윤이 부족한 동시에 금리는 계속 인상됨.
- 호황 때 기업과 은행은 유가증권을 발행하여 현금 보유량보다 훨씬 더 많은 신용을 제공한다.
- 신용을 얻기 쉬우면 각 기업은 생산적 투자를 크게 늘려 경쟁 업체들보다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려 든다. 경쟁하는 기업들의 생산량을 모두 합치면 시장이 흡수할 수 있는 규모를 훨씬 초과하더라도 말이다.
- 또, 대출하려고 차입하고 차입하려고 대출하는 매우 수익성 높은 사업(투기)에 온갖 사기꾼과 협잡꾼이 몰려든다.
- 그러다가 경제가 하강하기 시작하면 신용이 결제돼야 하지만 이윤의 양이 너무 적어서 그럴 수 없다.
- 기업과 은행은 서로 상대방의 상환 능력을 의심하고, 대출이 사실상 중단된다.
- '허구적 자본'의 작용은 호황-불황 순환을 더욱 격화시키기도 한다.
- 허구적 자본은 비생산적이지만 그 화폐가치는 어느 시점의 실물 자원에 대한 청구권을 나타낸다.
- 호황기에 주가가 오르면 주식 소유자들의 상품 구매력이 강화돼 호황이 더욱 탄탄해진다.
- 불황기에 주가가 떨어지면 경제 전체의 지출이 감소해 불황이 더욱 강화된다.
- 다양한 허구적 자본의 가격은 필연적으로 불안정하고 급등락을 반복한다. 그래서 체제 전체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킨다.
-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 생산의 토대 때문이 아니라 금융·은행·화폐 때문이라고 보는 착각이 나타난다.
- 마르크스의 위기 설명은 당대 주류 경제학자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주류경제학은 1930년대에야 경제 위기를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 경제 위기는 마르크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 마르크스 위기 이론의 문제는 1940 ~ 1970 년대의 장기 호황에 관한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 경제 위기 자체는 자본주의를 끝장내지 못했다. "인간이 숨을 들이마쉬고 내쉬면서 살아가듯이 자본주의도 경제 위기와 호황으로 살아간다."(트로츠키)
- 자본주의의 장기적 동역학은? 이윤율 저하 경향, 자본의 집적과 집중
- 자본주의는 스스로 발전시킨 생산력 때문에 파멸할 수밖에 없다.
- 스미스: 경쟁의 격화 때문에 이윤율이 떨어진다고 생각
- 리카도: 농업의 '수확체감' 때문에 이윤율이 떨어진다고 생각
- 개별 자본가는 노동자의 생산성을 향상시켜 자신의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
- 노동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방법은 노동자 1인당 점점 더 많은 생산수단(도구, 기계 등)을 사용해 작업하게 하는 것이다.
- 그러면 자본의 기술적 구성(생산수단의 물리적 양 / 노동력의 양)이 증가한다.
- 이에 따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불변자본의 가치 / 가변자본의 가치)도 증가할 것이다.
- 그런데 체제 전체로 보면 잉여가치의 원천은 노동뿐이므로, 투자가 노동력보다 더 빠르게 증가한다면 그 투자는 이윤보다 더 빠르게 증가할 것이다.
- 자본 투자가 이윤의 원천보다 더 빠르게 증가한다. 그 결과 이윤율(이윤/투자)에 하락 압력이 나타난다.
- 개별 자본이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생산성 향상 노력이 전체 자본에게는 이윤율 하락이라는 재앙이 된다.
- 기술 발전이 '자본 집약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자본 절약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 신기술 중의 일부는 노동자 1인당 사용하는 기계와 원료를 감소시킬 수 있다.
-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주장이 논박되는 것은 아니다. '자본 절약적' 혁신보다 '자본 집약적' 혁신이 더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 현실 세계에서는 기업 경영가는 모두 생산수단(과거의 연구·개발에 포함된 죽은 노동 포함)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것이 선진 기술에 접근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혁신의 '비용' 문제)
- 자본가들은 신기술이 이윤을 늘릴 때에만 신기술을 도입할 것이다. 신기술 도입으로 자본가의 이윤이 늘어나면 자본가계급 전체의 평균 이윤도 늘어난다.
- 마르크스 자신의 저작에 이미 그에 대한 간단한 답변이 실려 있다.
- 신기술에 투자한 최초의 자본가는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해 초과이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초과이윤은 경쟁이 확산되면서 사라지고 만다.
- 한 자본가만이 신기술을 도입해 노동생산성을 향상하면 그 자본가는 사회적 필요노동량보다 적은 비용으로 사회적 필요노동량의 가치를 가진 상품을 만들 수 있어 초과이윤을 얻는다.
- 그러나 모든 자본가가 신기술을 도입하면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필요노동량이 재조정돼 처음에 신기술을 도입한 자본가의 초과이윤은 사라진다. 그리고 신기술을 얻는데 필요한 생산수단이 증가하여 이윤율이 낮아진다.
- 착취율 증가(노동시간 연장, 실질임금 삭감, 노동강도 강화, 노동자 생계수단 가치 감소)로 노동자 1인당 잉여가치를 더 많이 생산하면 투자 단위당 노동자 수가 줄어들더라도 괜찮을 것이다.
- 이 방법으로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노동일의 길이에는 한계(24시간)가 있고, 노동시간 중 노동자 부양시간을 줄이는 데도 한계(0시간)가 있다. 그 반면, 생산수단에 대한 투자는 한없이 늘어날 수 있다.
- 착취율이 매우 높으면 그로부터 나온 많은 양의 잉여가치가 확대재생산에 재투자될 것이다. 그러면 이윤율은 저하한다.
- 노동생산성이 향상되면 생산설비·원료의 가치도 감소한다. 자본의 기술적 구성(물리적 비율)이 증가한다. 반면, 공장·기계 등의 구입 비용이 감소해 자본의 유기적 구성(가치의 비율) 증가는 자본의 기술적 구성 증가보다 느릴 것이다.
- (비판) 이것이 '상쇄 경향'이 이윤율 저하 경향에 대한 '부정'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생산성 향상으로 생산재의 가치가 감소하면 투자비용이 낮아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낮아지고 이윤율이 상승한다는 것이다. (시간을 두고 일어나는 일에, 동시성을 가정한 연립방정식을 적용해서 생긴 오류)
- 그러나 이 비판은 틀렸다. 투자와 생산기술 향상에 따른 투자비용 감소는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다. 투자가 먼저 일어나고, 생산이 진행되고, 투자비용 감소는 나중에 일어난다. 자본가가 이윤율을 계산할 때는 지금 가동 중인 생산수단에서 나오는 잉여가치와 예전에 그 생산수단을 구입하는데 든 비용을 비교한다.
- TODO: (더 알아보기) 투하자본의 가치 감소 문제
- 생산성 향상을 통한 자본의 감가상각은 그 자체로는 이윤율 저하를 막을 수 없지만 경제 위기와 맞물리면 그럴 수 있다.
- 경제 위기 때는 일부 자본가들이 파산한다. 파산한 자본가들은 자신의 자본을 헐값에 처분할 수밖에 없다. 경제 위기에서 살아남은 자본가들은 생산수단을 헐값에 사들여 자신의 이윤율을 회복할 수 있다.
- "경제 위기는 항상 기존의 모순을 일시적·폭력적으로 해결하는 것일 뿐이고, 교란된 균형을 일시적으로 회복시키는 강력한 폭발이다."
- 호황기의 신규 투자 과정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면 이윤이 하락한다. 이윤율 하락의 직간접적 효과로 경제 위기가 발생한다.
- 이윤율 하락의 직접적 효과: 기업 투자 중단 -> 생산재 산업 불황 -> 불황이 다른 부문으로 확대
- 이윤율 하락의 간접적 효과: 기업이 실질임금 삭감으로 이윤율 방어 -> 소비재 산업 상품 판매(이윤의 실현) 불가 -> 불황
- 그런데 경제 위기가 일어나면 많은 기업이 파산해 살아남은 다른 기업들의 이윤율을 회복시켜준다.
- 이윤율 저하는 주기적 경제 위기 발생에 일조하고, 주기적 경제 위기는 이윤율의 장기적 저하 문제 해결에 일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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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어는 자본주의가 한없이 확대될 수 있다는 바우어를 비판, 자본주의가 생산이 지속될 수 없는 지점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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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의 규모가 이미 축적된 자본의 규모에 비례해서 확대되어, 축적이 기존의 잉여가치와 노동력 재생산비용까지 모두 흡수하는 순간이 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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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 자본가들이 이윤율 저하에 대응해 투자 증가율이 낮아지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 경향도 완화될 수 있다. 이 경우 '붕괴'는 매우 오랫동안 지연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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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만의 주장이 적용될 만한 가설적 상황은 있다. 그것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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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들 간의 경쟁이 격화돼 개별 자본이 선진 기술에 대한 값비싼 투자를 하게 되는 경우, 생존을 위한 기술적 전제 조건과 이윤율이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돌할 수 있다.(자본의 사용가치와 자본의 가치 증식 가능성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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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황 불황 순환 때 일부 기업이 업계에서 퇴출되면서 다른 기업의 장기적 문제가 완화되는데, 그런 과정을 방해하는 요인이 생길 수 있다. (아마 한 기업이 무너지는 것이 전체에 큰 타격을 주는 경우와 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공적자금을 대는 경우를 말하는 것 같다.)
- 집적: 개별 자본이 착취를 통해 축적되고, 더 크게 성장하는 것
- 집중: 경제 위기 때마다 일부 자본이 제거돼서 살아남은 자본이 체제의 더 큰 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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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별 자본 단위가 클수록, 그리고 체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클수록, 그 자본 단위가 파산할 때 체제의 나머지 부문이 받는 충격도 클 것이다. 거대 기업 하나가 파산하며 그 기업이 제공하는 시장에 의존하는 다른 대기업들과 그 기업에 돈을 빌려준 은행들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도미노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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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규모가 클수록 시장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가치법칙을 회피할 수 있다). 기업은 자신이 생산한 상품의 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다면 자체 생산비가 사회 전체 생산비보다 비싸더라도 이윤을 남길 수 있다. 대규모 고정자본이 필요한 생산 부문에서 시장 점유율이 높을 때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기업이 이 분야에 진입해 경쟁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시장을 선점한 기업은 오랫동안 심각한 경쟁을 피할 수 있다.
-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다른 노동과 직접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속한 자본가의 지휘를 받음으로써 그렇게 한다(기업 안의 분업(독재)). 따라서 시장에서의 경쟁(사회 안의 분업(무계획))을 통한 가치법칙은 노동에 직접 작용하지 않고, 자본가의 의식적 규제에 의해 작용한다. 거대 자본이 시장의 압력을 일시적으로 회피할 수 있다면 그 자본이 지휘하는 노동도 가치법칙을 당분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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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것이 무한정 지속될 수는 없다. 더 선진적이고 새로운 생산 방식이 체제 전체로 확산되면 갑자기 심각한 경쟁이 벌어질 것이다. 경제 위기의 충격을 받으면 기업은 가치법칙에 따라 생산하기 위해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보호받던 기업이 많을 수록 경제 위기의 파괴력이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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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가 벌어지기 전에는 거대 기업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다. 그 기간이 매우 길 수도 있다. 그러나 체제가 경제 위기에서 자유로워 진 것이 아니다. 체제가 경제 위기를 피한 대가는 이윤율의 저하를 상쇄할 수 있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은 것이다. 자본은 사소한 경제 위기는 피하지만 결국 훨씬 더 심각한 경제 위기를 겪게 된다.
-
TODO: 더 알아보기: 문맥상 거대 기업이 노동생산성이 낮은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생산하며 이윤율을 보호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것 같다. 그것이 맞는가? 그런 사례로는 무엇이 있을까?
- 마르크스가 생산력 발전을 강조한 것과 경제성장 지상주의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경제성장의 모순을 지적했다. "생산력과 소통 수단이 현존 관계들 아래서는 오직 재앙만을 낳을 뿐이고 더는 생산력이 아니라 파괴력에 불과하게 되는 단계가 등장한다."
-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생태 파괴를 비판하기도 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자본은 잉여가치 추구 때문에 자연의 활력을 파괴하고 인간의 생활 조건도 파괴한다. "자본주의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지와 노동자를 동시에 파괴함으로써만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술과 결합도를 발전시킨다."
- 엥겔스, <자연의 변증법>: 인간이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동물과 다르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의 자연 정복은 흔히 뜻밖의 부정적인 결과를 불러와서 기존의 성과를 상쇄한다. 현재의 생산양식은 오직 직접적이고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주로 관심이 있다. 이런 목적으로 한 행동들이 장기적으로는 사뭇 다른, 심지어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
- 자본주의는 결국 인간의 생존 및 인간 존재의 온갖 형태에 필요한 환경적 조건 자체를 파괴할 수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가 경제 위기와 함께 갖고 있는 고유한 한계다.
- 자본주의는 소외된 노동이 계속 확대되는 체제
- 자본주의는 축적을 위한 축적만이 목표인 체제
- 자본의 목표는 오직 자기 증식뿐이다.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처럼 산 노동을 흡수해야만 활기를 띠고, 산 노동을 많이 흡수할 수록 더욱 더 활기를 띤다.
-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향해 팽창하는 체제
- 자본주의는 스스로 팽창하는 체제일 뿐 아니라, 경제 위기와 이윤율 저하 압력에서 드러나는 모순된 힘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팽창하는 체제다.
- 자본주의는 전 세계를 경쟁과 축적이라는 광란의 리듬에 맞춰 춤추게 만든다.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근본적 경향과 일반 법칙을 파악하려 하면서 시장의 일상적 기능이나 특정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을 대부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마르크스는 해외 무역 문제, 자본주의 체제가 전자본주의 지역을 흡수한 영향, 국가의 구실 등을 다루지 못했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모델과 현실의 간극 때문에 많은 물음이 대답되지 않은 채로 남겨졌다.
- 1870년대 ~ 1880년대에 불황이 계속될 때는 마르크스의 모델이 타당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90년대 영국에서 이윤율이 회복되고, 미국과 독일에서 새로운 경제성장이 일었다. 비스마르크가 독일 노동자에게 연급을 지급하고 도처에서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실질임금이 인상되기도 했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설명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였다.
- 마르크스의 모델이 현실에서 논박되는 듯하자 마르크스주의 진영이 위기에 빠졌다.
- 베른슈타인의 마르크스 비판(수정주의): "세계경제가 미증유의 폭력적 붕괴를 겪을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단일 산업의 과잉생산이 전반적 경제 위기를 뜻하지는 않는다.", "노동자들은 대부분 빈곤층으로 전락하지 않았다". 세계시장이 성장했고 산업 카르텔이 나타나 생산을 규제하기 때문에 전반적 상업 위기가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 카우츠키는 마르크스를 수정한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비판했다. 하지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앞으로 한없이 안정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는 주장을 사실상 받아들였다.
- 힐퍼딩, 레닌, 부하린, 룩셈부르크는 마르크스의 분석을 더욱 발전시켜 그런 견해에 도전하려 했다.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전자본주의 사회에 확대되면서 벌어지는 전쟁을 다뤘지만,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서로 전쟁을 벌이는 이유에 관해 자세히 분석하지 못했다. 힐퍼딩은 최초로 마르크스 시대 이후의 변화를 설명하려 했다.
- 금융자본의 형성: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이 융합해 '금융자본'이 등장했다. 이런 바탕 위에서 거대 트러스트와 카르텔이 나타나 모든 산업부문을 지배하게 됐다. 카르텔이 인수합병을 거치며 확대되어 최종적으로 총카르텔이 형성되고, "그러면 자본주의 생산 전체는 모든 산업부문의 생산량을 결정하는 단일 기구에 의해 의식적으로 규제될 것이다." (TODO: 금융자본과 카르텔의 연관은 무엇인가? 카르텔은 단순히 집적으로 인한 과점 아닌가? 총카르텔의 형성은 가능한가?)
- 국제 경쟁과 국가의 기능 변화: 일국 내에서 금융과 산업이 융합되면 국가는 자국 자본가들의 국제경쟁력을 지원하기 위해 보호관세 정책을 추진해야 하는 압력을 받는다. 거대 트러스트들은 국가가 최소한의 기능만 하는 '야경국가'라는 전통적 자유주의 개념을 버리고, 자신들의 독점이윤이 보장되는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국가가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를 원했다. "자유무역은 식민지에 관심이 없었지만, 보호무역주의는 더 적극적인 식민지 정책과 국가 간 이해관계 충돌로 직결된다." "금융자본의 정책은 전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 제국주의가 필연적이지 않고 자본의 국제 협력이 가능하다고 본 이론가들
이론가 | 제국주의에 관한 견해 | 금융자본에 관한 견해 ---- | ---- | ---- | ---- 힐퍼딩, <금융자본론> | 독점기업 성장해도 자본주의 위기 지속. 독점기업과 국가의 협력으로 경제 위기를 완화 가능. (모호한 부분) | 금융과 생산적 자본주의의 융합 힐퍼딩, 재무장관 시절 | 베른슈타인 '조직 자본주의' 이론 수용. 시장의 무계획성과 경제 위기 경향 사라짐. 각국의 '조직 자본주의'가 서로 협력하므로 전쟁 필연성 없음 카우츠키 | 전쟁은 대다수 자본가들의 이익을 거스르는 것. 자본가 초제국주의 협력 가능 | 금융자본은 국가가 자신의 확장을 지원하기 원하므로 제국주의와 직접 연관. 반면, 산업자본은 자유무역을 통한 시장 확대로 성장하므로 국제적 화합 선호 홉슨 (자유주의자) |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금융자본에서 직접 이득을 넏는 금리생활자들이 제국주의 원인 | 금융기관은 국내 산업투자 모험보다 해외에 대출로 이자를 챙기는 것을 선호하므로 식민지 확대 정책을 환영 노먼 에인절 (자유주의자) | 자본주의 동역학은 근본적으로 평화적 | 금융은 유익하다. "금융만큼 완전히 국제화환 분야는 없다. 자본가에게는 조국이 없다." 나이절 해리스 (한 때 마르크스주의자) | 정부를 지배하는 힘은 기업보다 국민.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국가의 이해관계 때문에 세계가 위험해짐 | 엘런 우드(마르크스주의자) | 서로 충돌하는 "'정치적' 형태의 제국주의는 전자본주의 제국의 본질". 자본주의는 순수한 경제적 과정이므로 여기에 필요한 국가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통제하는 국가 | 하트, 네그리 | 자본주의에 필요한 국가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통제하는 국가 |
- 부하린·레닌: 은행자본·산업자본·국가의 융합(힐퍼딩) 진행됐다. 그렇지만 그런 융합이 모종의 조화로운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 자본주의가 독점 단계에 이르면 대기업들 간의 경쟁은 더이상 과거처럼 순수한 시장 경쟁 방식만 따르지 않게 된다. 그들은 독점을 위한 온갖 수단을 사용한다. 원료를 지배하고, 운송 시설을 장악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덤핑을 하는 등 경쟁자들을 방해하여 업계에서 몰아내려 한다. 그리고 수지맞는 거래를 위해 '연줄'을 이용한다.
- 자본주의 열강들은 자기들끼리 세계를 분할해서 경쟁적으로 식민지 제국을 건설했다. 그 바탕은 참가국들의 힘(경제적·금융력·군사력 등)에 대한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이 참가국들의 상대적 힘이 일률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한 때 열강들의 힘의 차이에 맞춰졌던 세계 분할이 20~30년 뒤에는 맞지 않게 된다. 세계 분할은 재분할을 위한 투쟁으로 이어진다. "평화적 투쟁과 비평화적 투쟁의 형태 전환이 일어난다."
- 영국과 프랑스는 많은 식민지를 차지해 거대 제국을 건설했다. 반면에 독일은 경제적으로 영국을 따라잡기 시작했는데도 식민지를 별로 거느리지 못했다. 이런 불일치로 인한 충돌이 절정에 달한 것이 제1차세계대전이었다.
- 카우츠키는 제국주의가 (제3세계의) '농업' 지역을 지배하는 문제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레닌은 제국주의의 세계 분할이 점차 공업 지역에 집중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제국주의의 특징은 단지 농업 지역뿐 아니라 심지어 공업이 가장 발달한 지역조차 병합하려고 애쓴다는 점이다."
- 부르주아지의 국가기구는 자체 내에 부르주아 계급의 힘을 모두 집중시켰다. 모든 것은 군사화한다.
- 새로운 국가권력 모델, 제국주의 국가의 고전적 모델이 나타나고, 이것은 국가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의존한다. '경제'는 '정치'와 유기적으로 융합된다.
- 국가는 착취 과정의 단순한 모호자가 아니라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자본주의적 착취자가 된다.
-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의 형성과 함께 경쟁은 거의 완전히 해외로 이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해외 경쟁의 투쟁의 기관들, 주로 국가기구가 엄청나게 증대해야 한다.
-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간의 투쟁이 무엇보다도 군사력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이유는 군사력이야말로 서로 투쟁하는 '국민' 자본가 집단들의 최후 수단이기 때문이다.
- 한 국가의 군사력이 혁신될 때마다 다른 모든 국가가 자극받는다.
- 비판자들은 군사적 투쟁이 아니라 평화적 자유무역이야말로 자본가들의 이윤 추구에 가장 적합한 노선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을 논박하는 것은 쉽다.
- 투자처, 상품판매처: : 19세기 마지막 25년간 서방 제국들이 크게 성장했다.(p.129) 같은 시기 영국의 자본수출이 므게 증가했다. 상품수출·자본수출이 모두 식민지로 간 것은 아니나 식민지는 중요했다.(인도가 영국 상품수출 12%, 자본수출 11% 차지) 식민지 수출을 통한 국제수지 흑자로 영국은 세계의 다른 지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 원료 생산지: 당시의 첨단 산업을 위한 원료는 식민지에서 생산됐다. (식물성 기름, 구리, 고무, 석유, 질산염 등)
- 지정학적·군사적 중요성: 바다를 지배할 필요성, 식민지의 군사 기지
- 역사적 사실: 수십 년간 식민지가 급격하게 확장되고 자본수출과 원료 수탈이 급증한 바로 그 시기에 수익성과 시장이 회복돼 대공황(? 시기가 맞지 않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본주의 호황과 제국이 일치한 것은 분명한 현실이었다.
- 레닌의 이론은 19세기말 영국의 경험을 모든 제국주의로 일반화한 것.
- 금융자본을 수출하는 은행들의 핵심 구실에 이론 전체가 의존하는 경향.
- 자본수출은 영국의 주요 특징이었을 뿐, 영국과 경쟁하는 후발 제국들의 상황은 달랐다. 독일은 금융이 아니라 산업(중공업) 카르텔이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다. 그리고 1차세계대전 이전 미국과 러시아는 식민지 자본수출이 아니라, 다른 자본주의 국가로부터 자금이 유입됐다.
- <제국주의론> 이후 25년동안은 더욱 이론과 현실이 맞지 않게 됐다. 해외에 투자된 자본은 1914년 수준을 기점으로 더 낮아졌다. 그러나 거대 자본주의 열강은 그 사이에도 여전히 제국주의적 확장에 몰두했다.
- 레닌의 글은 금융자본이 제국주의의 주된 원인인 것처럼 해석될 여지가 있다. 이에 따라 일부 좌파는 금융자본에 맞서 산업자본과 반제국주의 동맹을 맺는 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 부하린은 금융자본을 산업자본과 다른 것으로 보면 안 된다고 분명히 경고했다. "금융자본을 화폐자본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은행자본이면서 동시에 산업자본이기도 하다는 점이 금융자본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 부하린이 볼 때 제국주의는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이 세계 무대에서 다른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들'과 경쟁하면서 자국 국민경제 전체를 지배하는 추세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이 경쟁은 굳이 해외투자에 집중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나라에 있는 기존 공업 지대나 주요 원료 산지를 무력으로 빼앗을 수도 있었다. "제국주의가 발전할수록 자본주의의 중심부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도 격렬해질 것이다."
- 그러므로 더 많은 가치를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이미 소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도 막대한 양의 잉여가치를 파괴 수단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 경쟁이 국가 간 관계에 적용된 것이었다.
- <자본론> 2권 재생산표식에 따르면, 올해 생산에서는 지난해 생산물이 물질적 투입물(생산재)과 노동자의 소비재로 사용된다. 그것은 가치의 양이 정확히 이전되는 것이면서 사용가치의 종류가 정확히 이전되는 문제다.
- 생산 년도가 바뀔 때 확대재생산에 필요한 사용가치 분배와 가치 분배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가 받은 임금보다 더 많은 소비재가 생산되거나 자본가의 이윤으로 구매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생산재가 생산된다. 즉, 자본주의 체제는 필연적으로 시장이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할 수밖에 없다. 과잉생산은 호황-불황 순환의 일시적 국면이 아니라 고질병 같은 것이다.
- 자본주의가 전자본주의 안에서 성장해 확대될 때는 자본주의적 구성 요소가 아닌 사람들에게 생산품을 판매하고 원료를 사들여 과잉생산물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특정 나라에서 지배적 체제가 될 수록 과잉생산의 모순은 커졌다. 따라서 외국으로 나가 전자본주의 사회들을 식민지로 삼아 시장을 개척하는 일은 자본주의의 지속에 필수적이다.
- 바우어: 여러 해 동안 생산이 반복되어도 투입물과 산출물이 균형을 이루는 데 문제가 없다. (독자적 재생산표식으로 증명)
- 바우어에 대한 룩셈부르크의 대답: 자본가들이 투자를 지속하려면 자본주의 외부의 인센티브가 있어야 한다. 투자량의 증가만으로는 사회적 생산량의 증가를 감당할 수 없다. 그러면 자본가들은 자신의 투자를 정당화할 이익을 얻을 수 없다.
- 부하린: 불합리해 보이는 축적을 위한 축적 자체가 자본주의의 특징임은 마르크스가 이미 지적했다. 자본가는 좋든 싫든 자본주의 자체의 동역학에 따라 축적을 위한 축적을 강요받는다. 자본주의에서 생산과 소비가 어긋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그런 불일치를 극복하는 계기가 된다. 자본주의 과잉생산은 경제위기 과정에서 나타나고 경제위기가 더 심각해지면 사라진다. 제국주의는 과잉생산이 아니라 자본가의 이윤 추구에 따른 필요로 인해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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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과 부하린은 제국주의 확장의 절정기에 자본수출이 자본주의를 대공황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던 이유를 해명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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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의 이론에는 문제가 많았지만 제국주의가 경제 위기의 일시적 완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파악하려는 노력이었다는 점은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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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크 그로스만(1920년대): 기존의 축적 중심지에서 새로운 축적 중심지로 자본이 유입되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높이고 이윤율을 떨어뜨리는 압력이 단기적으로 완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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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스만의 통찰에 따라 19세기말 제국주의 전성기에 이뤄진 경제 발전의 실제 패턴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영국 해외투자의 절반이 국내에 투자됐다면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증가했을 것이고, 그러면 이윤율은 떨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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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 상승으로 인한 이윤율 하락 압력을 완화하는 일시적 부수 효과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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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것은 일시적 효과일 뿐이다. 결국 새로운 축적 중심지에 대한 투자는 새로운 잉여가치를 창출할 것이고, 그 잉여가치는 새로운 곳에 투자돼야 하고 이윤율 저하 압력을 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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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일시적 효과가 사라지고 이윤율 저하 압력이 강해진 20세기 초 수십 년간 국가간 긴장이 고조됐다.
- 고전적 제국주의론은 '국가와 자본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에 답하지 않았다. 마르크스 사후의 자본주의를 진지하게 분석하려면 이 문제를 피해갈 수 없다. 한 예로 GDP의 정부 지출 비율은 계속 커지고 있다.
- 마르크스주의자·비마르크스주의자 모두에게서 가장 흔한 관점.
- 자본주의는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자기증식자본)으로 이뤄지는데, 기업들에게는 지리적 기반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개별 자본의 활동은 국가의 경계를 가로지른다.
- 반면 국가는 지리적 기반이 있는 정치적 실체이다.
- 국가는 자본주의 생산의 정치적 전제 조건(자본가 재산 보호, 지배계급 사이의 거래 감독, 재체 재생산에 필수적인 특정 서비스 제공, 자본주의 구성원들이 자본주의를 수용하게끔 개혁 조처 실행)을 창출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발전한 구조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국가 안에서 활동하는 자본들과 국가 자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 비판: 자본의 집적에 따른 국가의 기능에 관한 해명이 없음ㅋ
- 국가를 자본주의 경제체제 외부의 존재로 보는 관점은 국가를 (그리고 자본도) '단수'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 추상적인 논의에서는 타당한 설명이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다수의 국가와 다수의 자본으로 이뤄져 있다.
- 위의 문제점을 고전적 제국주의론을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 비판하는 견해.
- 국가독점자본주의론: 국가는 자본과 '융합'해서 '국가독점자본주의'가 됐다. 국가 간 충돌은 국가 내에서 활동하는 자본들의 국제적 경쟁이 표현된 것이다.
- 국독자론: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수정한 스탈린주의 이론
- 키드런: 개별 자본과 개별 국가가 완전히 융합됐다. 모든 국가는 자국 자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중요한 자본은 모두 특정 국가에 통합됐다.
- 비판: 국민국가가 '국민'자본과 완전히 융합됐다는 견해는 지나친 단순화다. 일례로 오늘날 다국적기업은 수십 개의 나라에서 활동한다.
- 엥겔스: 중세 말기에 점차 중요해진 도시 상인들('시민')이 왕과 동맹해서 다른 봉건 지배계급에 대항한 것. 국민국가의 시작은 기존 정치구조와 사뭇 달랐다.
- 레닌: "세계 전역에서 자본주의가 봉건제에 최종 승리를 거두는 시기는 민족운동과 연관돼 있다." ... "모든 민족운동은 국민국가 건설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현대 자본주의에 필요한 이런 조건들은 국민국가에서 가장 잘 충족되기 때문이다." ... "국민국가야말로 자본주의 시대에 전형적이고 정상적인 국가다."
- 역사적으로 특정 지역에서 자본주의적 축적을 지지하는 집단들은 자신이 속한 전자본주의 사회와 연결된 다양한 사회 세력에 맞서 자기방어를 해야 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다른 지역에 기반을 둔 다른 자본가와도 맞서야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무력을 써서라도 자신들의 공동 이익을 지키기 위한 정치 구조를 만들어 냈다.
국민국가 건설 주체 | 방법 | 사례 |
---|---|---|
부르주아 | 기존 국가를 장악·재편 | 영국, 프랑스 |
부르주아 | 기존 국가와 결별, 새로운 국가 건설 | 네덜란드, 미국, 20세기 후반 식민지 독립국들(식민지 정착민의 국가를 말하는 듯) |
구 지배계급 | 열강과의 경쟁에서 생존하기 위해 국민국가 건설 | 독일, 러시아, 일본 |
중간계급 지식인 | 식민지 민족해방운동 (중국, 쿠바 등) |
- 자본주의 이전에도 국가가 존재했지만 기존 국가들은 자본주의 성장에 따라 근본적으로 재구성됐다. 국경선이 재설정됐고, 모든 주민의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중앙집권적 구조가 수립됐다. 처음으로 모든 주민이 '시민'이 됐다.
- '자본의 논리'와 '국가들의 논리'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의 논리는 더 광범한 자본주의의 논리에서 비롯한 결과였다.
-
화폐자본과 상품자본은 (국가 등 무력 사용 기구의 방해가 없다면) 국경을 넘어 끊임없이 이동할 수 있다. 생산자본은 사정이 약간 다르다. 생산자본은 생산수단을 확실히 통제할 수 없다. 생산수단을 확실히 통제하는 최후의 수단은 '무장 집단'이다. 그리고 생산자본은 노동력이 없으면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따라서 특정 지역의 생산자본가들은 반드시 국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회적·정치적 조건을 형성하려고 함께 노력한다.
-
대다수 자본주의 기업은 시장의 이해득실 뿐 아니라 다른 기업과 맺은 장기적 관계도 감안해서 활동한다. 각종 금융 인센티브, 사업 특혜, 개인적 연줄을 이용해 다른 기업들을 붙잡아두려고 한다. 생산은 개별 기업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성장해 온 "산업 단지"에서 이뤄진다. 주류경제학 시장 모델의 자본은 다른 자본과 맹목적으로 경쟁하는 고립된 원자들이다. 그러나 현실 세계의 자본가들은 항상 다른 자본가 또는 정치인들과 동맹해서 경쟁력을 강화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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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이동할 수 있는 화폐자본조차도 자신의 국민국가가 중요하다. 상업신용은 개별 자본주의 기업들 사이의 주관적이고 사적인 신뢰에 달려 있다. 이 신뢰는 그동안 상거래 관계에서 축적한 지식을 이용한다. 이 지식을 제공하는 네트워크는 국가가 중앙은행을 관리하기 때문에 국민국가별로 발달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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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자본의 관계는 무장 집단을 통제하는 사람들과 대중을 착취하는데 관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국가의 주요 인사들과 개인적 인연을 맺는 것은 모든 자본가에게 중요하다. (레닌이 말한 "연줄"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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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호작용은 자본의 내부 구조에 흔적을 남긴다. 그래서 특정 자본이 다른 자본이나 국가와 갑자기 사이가 틀어지면 그 자본은 매우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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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국가의 발전은 다국적 자본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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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그 국가에 연결된 자본들은 하나의 체제를 형성해서 상호 영향을 미친다. 국가든 특정 자본이든 이 구조적 상호의존 관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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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자본은 특정 국가에서 활동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할 수 있다. 활동 기반을 다른 나라로 옮기면 내부 조직이나 다른 자본과의 관계를 모두 바꿔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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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특정 자본들의 필요에 부응해야 한다. 국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는데 필요한 자원(특히 조세수입)을 그들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국가가 자본의 필요에 부응하지 않으면 자본은 유동자산을 해외로 빼돌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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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가 다른 국가에 가하는 압력은 자국 자본이 다른 나라에서 활동할 때 자신의 이익을 보장받는 데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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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경쟁하는 국가들의 존재는 자본주의 외부에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고 자본가들의 선택 사항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체제의 동역학에 필수적 일부다.
- 국가와 자본은 상호의존 관계이지만 국가와 자본은 구별된다.
- 클라우스 오페: "총자본은 오직 관념적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 " 완전히 다른 정치·행정 시스템의 특별한 지도와 감독이 필요하다."
- 국가의 기능1 - 기업이 경쟁 떄문에 스스로 할 수 없는 일: 국가는 서로 경쟁하는 자본들을 중재하고, 사법제도를 운영하고, 중앙은행을 통해 금융 시스템과 국내 통화를 관리·감독한다.
- 국가의 기능2 - 국민을 체제 내로 통합하는 메커니즘: 강압 메커니즘(경찰 보안경찰, 감옥 등)와 통합 메커니즘(의회 기구, 단체교섭 체계, 개혁주의·보수주의·파시스트 정당들). 두 메커니즘은 (상황에 따라 비중이 달라지지만) 항상 상호 보완하며 존재한다.
- 효과적인 국가는 다양한 사회 집단의 지원(또는 묵종)을 얻어 내면서 그들이 어느 정도 독자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 따라서 국가는 자본 일반의 이해관계뿐 아니라 다른 사회집단과 계급을 포섭하려고 제공하는 양보도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상당한 정도의 자율성이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 마르크스: 국가 관료는 기존 지배계급의 지배를 보장하려고 등장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이익조차 지배"할 수 있는 기생충이 된다.
- 국가의 자율성이 극대화되는 때: 노동자·농민·프티부르주아 사이에 강력한 지지기반이 있는 개혁주의 정당·포퓰리스트 정당·파시스트 정당이 집권했을 때 자율성이 극대화된다. 그런 정부는 자국 영토 내의 주요 자본가 집단과 결별하거나 그 재산을 몰수할 수도 있다.
- 자본의 국익 침해: 반대로, 개별 자본이 '자국' 국가의 이익을 해치는 경우도 많다. 자금과 투자의 해외 유출, 경쟁국의 자본과 거래, 적국에 무기 판매 등.
- 자율성의 한계: 그러나 국가와 자본의 자유로운 행동에는 한계가 있다. 국가의 조세수입과 무장능력은 결국 자본축적의 지속에 달려 있다. 역으로, 개별 자본은 한 국가에서 다른 국가로 자신의 기반을 옮길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피착취계급의 저항을 억누르고 다른 자본·국가에 맞서 자신을 보호해 줄 국가가 필요하다.
- 국가와 자본이 서로 결별하는 것은 어렵고 위험하다. 국가가 사적 자본을 공격하면 사람들이 자본축적 자체에 도전할 위험이 있다. 자본이 국가와 결별하면 적대적이고 위험한 세계에 노출된다.
- 국가 관료가 사적 자본가계급의 수동적 창조물일 뿐이라거나 어떤 형태의 자본과도 이해관계가 다른 별개의 정치 집단이라는 견해가 흔하다. 그런 견해는 계급이 재산 소유 여부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국가 관료는 착취 계급이나 착취 계급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엘런 우드, 데이비드 하비가 비슷한 견해)
- 그러나 마르크스 사후 자본주의를 분석할 때 국가는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회의 총소득 가운데 국가의 손을 고쳐가는 몫은 이윤·이자·지대로 사적 자본에게 직접 돌아가는 소득보다 훨씬 많다.
- 계급을 분석할 때, 법률적 소유 개념에 따른 구분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는 계급이 그런 형식적 개념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처한 위치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봤다. 계급은 물질적 생산과 착취에 대한 관계 때문에 다른 인간 집단에 맞서 함께 집단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 지도적 국가 관료 계층은 싫든 좋든 자본축적의 대리인 노릇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외국자본의 이익이나 노동계급의 이익과 대립되는 국내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자신들의 이익과 동일시하게 된다.
- 국가 관료의 '자율성'은 국내 자본의 축적 요구를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 하는 제한된 수준의 자유일 뿐, 그런 요구를 실행할지 말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결코 아니다.
- 국가 관료의 수입이 세금 부과, 정부 차입, 통화 발행을 통하기 때문에 자본축적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감춰진다. 국가의 수입은 사회의 총잉여가치(착취된 노동) 가운데 일부다. 상이한 자본 부문이 잉여가치를 지대, 이자, 상품 판매 수익, 생산자본의 이윤으로 분할하는 것처럼 국가도 잉여가치의 일부를 가로챈다. 국가 관료와 나머지 자본가계급은 총잉여가치 중 자신이 차지할 몫을 둘러싸고 충돌한다.
- 국가 관료제를 이끌어가는 자들이 개인적으로는 자본을 소유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은 자본축적의 대리인 노릇을 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마르크스의 정의대로라면 그들은 자본가 계급의 일부일 수밖에 없다.
- 자본주의 생산이 발전하면 자본가계급 내부에서 기능 분화가 일어나, 생산과 착취를 실제로 조직하는 직접적 구실이 자본 소유자 대신 고액의 보수를 받는 경영자들에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 관리자들은 자본축적의 대리인으로 남아있는 한 여전히 자본가다.(마르크스)
- 더 나아가, 단일한 자본가계급이 다수의 금리생활자 자본가계급과 '창업자' 자본가계급으로 분화된다.(힐퍼딩)
- 덧붙여, 자본은 개별 자본의 축적을 담당하는 자본가와 국가를 통해 국가 안에서 활동하는 형제 자본들의 발전을 촉진하는 정치적 자본가로 분화된다. (하먼)
- 20세기에 대규모 국가 소유 경제 부문이 출현하였다. (1차세계대전의 독일, 2차세계대전의 독일·미국·영국, 소련, 중국)
- 많은 분석가는 국가가 운영하는 산업과 경제가 자본주의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그러나 고전 마르크스주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 마르크스: "정부가 광산·철도 등에 생산적 임금노동자를 고용해서 산업자본가의 기능을 하는 경우에는 국가자본도" … "개별 자본의 총합에 포함"
- 엥겔스: "근대 국가는 본질이 자본주의의 장치, 즉 자본가들의 국가로, 일국 총자본의 관념적 의인화다. 근대 국가가 생산력을 더 많이 장악할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국가자본가가 되며, 그만큼 더 많은 주민을 착취한다. 노동자는 여전히 임금노동자, 즉 프롤레타리아로 남아 있다."
- 카우츠키: "경제적·정치적 발전으로 말미암아 국가의 기능 확대가 더 절실해져서" ... "점점 더 많은 기능이나 산업을 직접 장악"
- 트로츠키: "경제 생활의 국가화는 기정사실이 됐다." ... "쟁점은 단 하나다. 앞으로 국가화한 생산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가 국가 소유로 바뀌었어도 근본적 생산관계나 자본주의적 축적의 동역학은 바뀌지 않았다.
- 국가에게 국유 산업의 목적은 국내의 축적이 외국자본들의 축적에 필적할 수 있게 해서 경제적·군사적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는 여전히 임금노동자여야 했고 노동자의 임금은 재생산에 필요한 최저 수준으로 낮춰야 했다. 국가는 국가 소유 기업 내부의 생산을 계획할 수 있었지만, 그 계획 자체는 사기업 내부의 계획과 마찬가지로 외부 경쟁에 종속됐다. 국유 기업의 목표는 자본의 자기 증식이었고, 기업 내부 활동에서 가치법칙이 작용하고 관철됐다.
- 힐퍼딩은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1920년대에 자본주의의 모순이 '조직 자본주의'에서 극복됐다고 결론내렸다.
- 사적 소유 자체를 자본주의와 동일시하는 견해는 사적 소유가 없는 군사적 국가자본주의에서도 체제가 여전히 서로 다른 자본들 사이의 경쟁적 축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 총력전의 시대에 서로 경쟁하던 국가들은 직접 교역하지 않았고 해상 봉쇄 때문에 해외시장 경쟁이 크게 제한됐다. 하지만 한 국가가 군사적 하드웨어를 축적하는데 성공할 때마다 다른 국가들도 비슷한 수준의 군사적 하드웨어를 축적해야 했다. 시장의 교환이 개별적 노동을 연결해 개인의 사적 노동을 사회적 총노동의 일부로 만드는 메커니즘은 군사적 경쟁이 서로 다른 국가들(폐쇄적인 듯했던)에서 이뤄지는 개별적 노동 행위들을 서로 연결하는 메커니즘으로 대체되었다.
- 군사적 경쟁과 경제적 경쟁은 임금을 낮추고 잉여가치를 축적에 사용하는 데서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은 축적의 형태가 생산재 사용가치의 축적인가, 전쟁도구 사용가치의 축적인가 하는 차이뿐이다. 이 사용가치를 통제하는 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체제 외부의 사용가치들과의 비교 즉 교환가치로 환산한 결과였다.
- 따라서 이윤율이 여전히 결정적 구실을 했다. 국내 경제의 투자를 배분하는 구실은 더이상 이윤율이 하지 않고 군대의 필요가 대체했다. 그러나 이윤율은 경제 전체를 제약하는 구실을 했다. 일국의 군비-산업 기구에서 총투자 대비 총잉여가치의 비중이 낮아지면 그 국가자본주의가 경쟁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약해졌다. 이윤율 저하는 경제 불황으로 이어지지는 않을 수 있지만 군사적 패배를 부를 수 있었다.
- 예) 신흥 관료 집단이 생산을 통제한 소련, 동유럽, 중국
- 국가는 시장 관계라는 세계 속에서 거대한 계획을 실행하는 고립된 체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국가들끼리 국내 생산력을 더 급속히 발전시키려고 경쟁하는 한 그 계획은 세계 수준과 비슷한 노동생산성을 유지하려는 계획일 뿐이다.
- 한동안 개별 자본주의 기업의 경영자들과 개별 국가의 운영자들은 자신이 처분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에 의존해 가치법칙의 압력(노동력의 가격을 체제 전체 가치 수준으로 낮추고, 세계 수준과 비슷한 노동생산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압력)을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한정 그럴 수는 없었다. 그들도 언젠가는 고통스럽고 위험할 수 있는 내부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자들에게 가치법칙을 강요하거나 아니면 세계의 세력 관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꾸려고 필사적인 도박(사기업의 사기성 농후한 마케팅, 국가의 군사적 도전)을 감행해야 했다.
- 그러므로 20세기 자본주의의 실제 역사는 평화적이고 정직한 경쟁이라는 경제학 교과서의 설명과 사뭇 달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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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1: 전시 국가자본주의에서 이윤율이 작용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이윤율이 저하돼도 전쟁의 필요 때문에 생산의 동기가 사라질 리는 없을 것이다. 생산성 향상과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는 무기 생산비를 낮춰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 유리하게 해줄 것이다. 그렇다면 전시 경제에서는 생산성 향상이 이뤄지면서도 생산이 중단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책에서는 왜 이윤율이 저하한 국가자본주의가 경쟁 국가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낮아진다고 하는가? (p.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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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에게 들은 답변: 기존 축적된 자본으로 당장의 생산성이 높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윤율이 낮다는 말은 총투자되는 자본에 비해 생산되는 잉여가치가 적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미래 국면의 생산에서 새롭게 투입할 수 있는 자원은 적어지게 될 것이다. 이것은 경쟁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따라서 각국은 이윤율을 높여야 하는 압력이 작용한다. 따라서 각국의 경영자는 자국의 임금 노동자 계급 전체와 대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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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의문: 전쟁의 논리는 가치의 경쟁이 아니라 사용가치의 경쟁이 아닌가? 이윤율 저하로 가치의 생산이 낮아지더라도 사용가치 즉 생산재, 소비재, 무기의 생산은 점점 더 효율화되고 국가가 전산업을 통제함으로써 생산의 중단 없이 계속 생산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국가자본주의에서도 여전히 가치가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국가자본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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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문2: 국가, 기업을 운영하는 자들이 노동력의 가격을 체제 전체의 노동력 가치 수준으로 낮추라는 압력에 (자기가 처분할 수 있는 자원의 규모에 의존해) 저항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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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스스로 생각해 봄): 아마 노동력의 가격을 가치 수준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필요한 조처들이 노동자의 저항을 낳기 때문인 것 같다. 책의 바로 다음 부분에 서술된 것처럼 그런 내부 구조조정은 고통스럽고 위험하다. 이것 외에 다른 이유도 있는지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 스미스가 생산적 노동과 비생산적 노동을 구별함.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 마르크스도 자본주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이 구별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킴.
- 구별의 기준: 자본가의 관점에서 무엇이 생산적인가? 즉, 잉여가치를 창출하여 자본 축적에 기여하는 노동인가?를 기준으로 구별해야 한다.
- 구별 기준이 아닌 것: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물질 생산과 서비스, 생산물의 사회적 유용성은 구별 기준이 아니다.
서비스 노동의 종류 | 평가 | 예 |
---|---|---|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가져 상품으로 거래되는 서비스 노동 | 생산적 | 연극 배우의 연기, 미용사의 미용 |
생산을 완성하는 과정의 일부로 포함되는 서비스 노동 | 생산적 | 운수 노동자의 상품 운반 |
상품 유통에 기여하는 서비스 노동 | 비생산적 | 연예인의 상품 광고 출연 |
- 물질 생산인가 서비스 생산인가를 기준으로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을 구별할 수 없다.
- 굴리에모 카르케디: "'서비스'라는 범주는 혼란만 초래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 "'서비스'는 생산적 노동(호텔, 연극·영화 등의 오락)과 비생산적 노동(광고, 시장조사)을 모두 포함한다."
- 위기의 진정한 원인?: 흔히 1929년 10월 29일 월가의 붕괴(뉴욕 주가 3분의 1 폭락)로 공황이 시작됐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업체들은 주가 폭락 전부터 이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1929년 9월에 자동차 생산량은 3월보다 3분의 1이 줄어들었다.
- 제1차세계대전의 파괴 이후 몇 년 동안은 자본주의가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 새로운 산업(라디오, 인조견, 화학제품, 항공기, 냉장고, 자동차 등) 등장 -> 1914~1929년 미국 공업 생산량 갑절로 증가 -> 유럽에도 긍정적 영향
- 엘빈 한센: 자본주의가 이제 청년기에 이르러 "유년기 질병"이 "완화되고 있다."
- 어빙 피셔: "주가는 영구적일 듯한 고점에 도달했다" (월가 주가 폭락 직전. 폭락 후에도 한동안 정신 못 차리고 낙관론.)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우리 생애에 주식시장의 추가 폭락은 없을 것"
- 힐퍼딩: 시장의 무계획성과 경제 위기 발생 경향이 사라진 '조직 자본주의' 이론 주장
-
경제학 전문가들의 첫 반응은 기다리면 불황이 저절로 치유된다는 것. 그러나 경기회복은 1932년까지도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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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설 경제학은 당시에 대공황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었고 오늘날에도 설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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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의 원인을 설명하려는 시도
이론 / 이론가 |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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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구 | 노동자들이 명목임금 하락을 거부해서 스스로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수요와 공급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을 것이다. |
어빙 피셔 | (통화주의적 해석) 통화 공급이 너무 적었던 탓에 가격이 하락하고 그 결과 부채 수준이 누적적으로 증대했다. |
최근의 통화주의 이론 | (중앙은행의 조처가 문제) 미국 연방준비은행이 1930년~1931년에 통화 공급 감소를 막았으면 문제가 해결됐을 것이다. |
밀턴 프리드먼 | 뉴욕 연방준비은행장 벤저민 스트롱의 사망이 원인이다. |
하이에크 & 오스트리아 학파 | 1920년대초 과잉 신용이 생산구조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통화 공급 늘렸으면 불균형이 더 악화했을 것이다. |
제1차세계대전원인설 | 제1차세계대전의 여파로 세계경제가 혼란에 빠진 것이다. |
케인스 | 투자보다 저축이 많아져서 생산물에 대한 '유효수요'가 부족해진 것이 원인이다. |
보호무역주의원인설 | 자유무역이 제약받지 않았다면 경기 회복됐을 것인데, 1930년 여름에 미국이 스무트-홀리법을 제정해 관세를 높이는 바람에 보호무역주의 물결이 일어 그러지 못했다. |
- 각각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상대편 논리의 허점을 쉽게 들춰낼 수 있었지만 어떤 주장도 진지한 반론을 버텨 내지는 못했다.
- "대공황을 이해하는 것은 거시경제학의 성배" - 벤 버냉키
- 1930년대 대공황을 이해할 수 없다면 21세기에 공황이 재발할 가능성도 진지하게 검토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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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을 이해하려면 1920년대의 성격을 살펴보아야 한다. 1920년대에 경제가 급속하게 성장했고 신규 소비재가 급증했다. 하지만 생활수준 향상과 생산적 투자의 증가도 그처럼 많았던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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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1922년~1929년에 임금은 6.1% 상승했다. 산업 생산이 3분의 1쯤 증가한 동안 제조업 노동인구는 정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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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 겉보기에는 투자가 급증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생산적 축적 수준이 비교적 저조했다. (p.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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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요소: 재화에 대한 수요가 생산적 투자와 임금에 의해서만 창출됐다면 그 호황은 나타날 수 없었을 것이다. 제3의 요소가 있었다. 그것은 사치재 소비, 비생산적 지출, 신용의 증가였다. 이런 투자는 새로운 잉여가치를 창출하지 않아 수익성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p. 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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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요인들은 이미 월가 붕괴 전부터 공업의 호황을 지탱할 능력을 상실했다. 비생산적 지출을 떠받치던 신용 확대와 대규모 투기 때문에 근저의 문제들이 마지막 순간까지도 은폐됐다. 그러나 그것을 지탱하던 차입과 대출의 사슬에서 단 하나의 자그마한 균열이 생겨도 건물 전체가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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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이 한 번 시작되자 끝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산업의 불황이 은행을 압박하고 은행의 대출 축소가 산업의 불황을 심화시켰다. 호황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됐던 비생산적 지출도 삭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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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거리: 191~192쪽에 묘사된 신축 건물이 왜 비생산적 지출인지 생각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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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O: 의문: 1920년대에 생산적 투자보다 비생산적 지출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인가? 산업이윤율이 낮았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1920년대는 이미 이윤율이 낮은 상황에서 비생산적 투자와 신용에 의존해 불황이 오는 것을 지연시킨 것인가? 그런데 유럽 기준에서는 1차세계대전으로 가치가 파괴되었고 전후 복구를 위해 생산이 활발해야 했을 것이므로 이윤율이 높고 생산적 투자도 많아야 했던 것이 아닌가? 단순히 미국이 예외였던 것인가? 미국은 유럽 상황에서 득을 볼 수 없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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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는 <고용, 이자, 화폐의 일반 이론>에서 (1)저축이 투자보다 많아져서 재화에 대한 유효수요가 감소하고 따라서 생산량도 감소하고, (2)경제활동 수준이 낮아지면 다시 저축이 줄어서 투자 수준과 같아진다고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3)금리를 내리거나(통화정책), (4)세금 감면이나 정부 지출 증대로 사람들의 가처분소득을 늘리는 것(재정정책)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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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는 이런 정책이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봤다. 개인과 기업이 소비보다 저축을 더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투자가 취약한 이유를 투기꾼들의 군중심리, 기업인들의 "야성적 혈기"의 쇠퇴 탓으로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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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는 <일반 이론>의 여러 곳에서 또 다른 요인을 지적한다. 그는 자본투자를 확대하는 과정 자체가 투자에 대한 수익('한계효율')의 감소를 초래하며, 그래서 추가 투자 욕구를 감퇴시킨다고 주장했다. 자본의 공급이 증가하면 자본이 점점 덜 희소해지고 그래서 자본이 한 단위씩 추가될 때마다 이용자가 얻는 가치가 감소해서 결국은 제로가 된다는 것이다. (완전고용의 장애물이 체제 자체의 내재적 경향에 있음을 의미함. 케인스의 저작에서 가장 급진적인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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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에크는 순환적 경제 위기는 상이한 생산 부문들 사이의 불비례에서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과도한 신용" 때문에 생산재 생산량이 소비재 생산량보다 너무 빨리 증가한다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상이한 부문들이 서로 조정되는 불가피한 수단이 바로 경기순환이라고 생각했다. (마르크스가 경제 위기를 통해 자본주의 내적 모순이 부분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것과 유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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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TODO
- '자본주의 황금기', '영광의 30년'. 전후의 상황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장기 호황이었다.
- 생산량 증대: 1970년대 미국 생산량은 1940년대 수준의 3배. 독일 경제의 생산량은 1947년 수준의 5배. 프랑스의 생산량은 4배. 일본은 공업 생산량이 13배 증가.
- 노동조건 개선: 실질임금이 상승하고 사실상의 완전고용과 복지가 실현됐다.
- 제3세계 식민지 해방: 1955년 반둥회의 이후 유럽 열강들은 점차 식민지를 포기했다. 그리고 저발전 국가들이 선진국들을 따라잡기 시작할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됐다.
- 당시 좌파와 우파의 많은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파악한 체제 모순이 극복됐다는 주장을 정설로 받아들였다. 케인스가 제시한 방침에 따라 정부가 경제 위기에 대처할 수 있게 됐다고 본 것이다.
- 통화정책: 정부가 금리를 조정해 민간투자를 촉진
- 재정정책: 정부가 세수보다 더 많이 지출해 투자와 소비를 촉진
- 승수효과: 정부 지출 -> 고용, 임금 상승 -> 노동자의 임금 소비 -> 시장 확대 -> 경제가 완전고용 수준에 가깝게 성장 -> 소득·소비에서 나오는 조세수입 증가 -> 이전의 정부 지출 벌충
-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은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한 전형적 '케인스주의' 정책으로 여겨졌으며, 1940년대~1970년대초 보수당 및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에게 핵심적 경제 운용 방안으로 여겨졌다.
- 본래 케인스는 자본 투자에 따른 자본의 한계효율 체감에 관한 더 급진적인 개념을 제시했지만, 케인스 자신이 이런 급진적 통찰을 회피했고, 장기 호황기에 주류 경제학을 지배한 케인스주의는 케인스의 이론에서 이런 급진적인 요소를 없앤 버전이었다. (속류 케인스주의)
- 존 스트레이치, <현대 자본주의>, 1956 : 자본주의 위기가 개혁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 마르크스는 틀렸고 케인스가 옳았다.
- 제라르 뒤메닐, 도미니크 레비: 전후 경제성장의 원인은 산업자본이 케인스주의를 받아들여 복지국가라는 지형 위에서 노동계급 조직과 타협한 것을 바탕으로 축적을 지속한 것이다.
- 데이비드 하비: "국가는 완전고용, 경제성장, 시민의 복지에 집중하면서, 보통 케인스주의라고 부르는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을 광범하게 사용해서 경기순환을 누그러뜨리고 완전고용을 보장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케인스주의가 공식 경제 이데올로기였던 시절에는 케인스주의 경제 위기 방지책이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케인스주의 정책 없이도 미국은 1960년대까지, 서유럽과 일본은 1970년대까지 경제가 성장했다. 미국에서 케인스주의 정책은 1964년 케네디-존슨 정부의 세율 인하 조처가 실시되면서 최종 승리했다. 이때는 이미 대호황이 15년이나 지속된 뒤였다.
- 포드주의: 거대 자본주의 기업들이 끊임없이 증가하는 생산물을 노동자들이 구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은 임금을 지급하면서 노동자들과 타협했다는 것.
- 미셸 알리에타와 '조절학파' 마르크스주의: 케인스를 포드주의의 예언자로 보고, 케인스의 신고전학파 비판과 '유효수요' 개념은 자본주의의 특정 발전 단계에서 생산과 소비가 통합돼야 할 필요성을 부분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여긴다.
- 복지 정책: 전후 수십 년간 유력한 국가 개입 이데올로기의 하나. 복지 정책이 수요의 주기적 등락을 상쇄할 수 있다는 주장. 자본이 노동력 재생산을 보장해야 할 '공급 측면'의 필요와 시장을 계속 성장시켜야 할 '수요 측면'의 우려가 서로 일치하는 듯했다.
- 그러나 이런 설명들은 전쟁 전에는 불황을 겪었던 세계경제가 왜 전후에는 호황을 누렸는지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
- 더욱이 '포드주의' 경영자들이 실질임금 인상이나 복지 제공 등 이른바 케인스주의 정책을 의식적으로 추진하지는 않았다.
- 전통적 케인스주의 설명이나 '조절' 이론은 모두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다. 임금 인상과 복지가 호황을 낳은 것이 아니라, 호황으로 자본주의가 성장하고 완전고용이 실현되자 국가와 고용주가 노동력 재생산과 노동계급 불만 관리에 신경을 써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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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주의 설명이나 '조절' 이론은 전후 수십 년 동안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높은 이윤율을 설명하지 못한다. 미국의 이윤율은 2차세계대전 이전 40년 동안보다 50~100% 더 높았고, 1960년대 말까지 이런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대다수 국가들은 케인스가 제안한 '경기순환 대첵'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고 자본가들은 경제 호황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규모의 투자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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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실질임금이 급속히 상승하는데도 이렇게 높은 이윤율이 달성되고 유지된 이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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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를 통한 구조조정: 불황으로 자본이 구조조정돼 살아남은 자본이 축적을 재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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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인한 파괴: 막대한 투자가 생산적 투자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에 사용돼 이윤율의 감소를 방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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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요인들만으로는 호황이 길게 지속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생산적 투자가 일어났을 때 왜 다시 이윤율이 하락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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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한 기술혁신, 이주노동자 유입, 비공업국의 원료 가격 하락 등이 이유로 제시되기도 하지만 이런 요인들은 그 전에는 주기적 위기를 막지 못했다.
- 기존에 없던 새로운 요인은 평화기의 막대한 군비 지출이다. 전쟁 전 미국의 군비 지출은 GNP의 1%를 약간 넘겼지만 전후의 '무장해제' 기간에 군비 지출은 1948년에 4%, 냉전 시작과 함꼐 급증해 1950
1953년 13%로 치솟았다. 1950년대와 1960대 내내 전간기의 57배를 유지했다. - 군비 지출은 투자 가능한 잉여가치의 막대한 양을 소비했다. (키드런의 계산으로는 미국 총고정자본형성의 60%에 달함)
- 주류 케인스주의자들과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전후 호황을 설명할 때 군지 비출의 구실을 무시했다.
- 군비 지출의 유효수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몇몇 케인스주의자들은 군비 지출이 중요한 수요를 창출한다는 점을 파악했다. 군비 지출이 다른 경제 부문에 제공하는 시장은 더 광범한 경제의 등락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군비 지출은 경제순환의 하락 추세에 제한을 가하는 완충 구실을 했다. 폴 배런과 폴 스위지는 군비 지출이 계속 증가하는 잉여를 흡수해 과잉생산을 극복하는 중요한 매커니즘으로 보았다. (문제점) 그러나 군비 지출을 충당하기 위한 과세는 왜 다른 경제 부문의 수요를 줄이지 않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또, 미국 정부의 군수품 구매는 유럽 경제를 부양하는 데서 직접적 구실을 할 수 없었다.
- 군비지출의 진정한 효과: 키드런은 과소소비가 아니라 이윤율의 개념으로 군비 지출을 설명했다. 군비 지출은 비생산적 지출과 마찬가지로 단기적으로는 이윤을 감소시키지만 장기적으로는 추가 축적에 이용할 자금을 줄이는 효과를 낸다. 그래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는 것을 늦춰 이윤율 하락을 늦춘다. 전후 수십년 간 미국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불황 전의 수십 년간보다 느리게 증가했으며, 미국의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전후 유럽보다 훨씬 낮았다.
- 자본의 일부는 군비 경제가 호황을 지속시키는 효과를 낸다는 것을 알아챘음이 분명하다. '군산복합체'는 경쟁 열강과의 경쟁뿐 아니라 군비 예산이 축적을 지속시킨다는 점도 이용해서 지배계급을 단결시켰다.
- 1960년대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는 정부 지출과 '계획 시스템'(대기업이 투자를 몇 년 전에 미리 계획하는 것) 사이의 내적 관계를 설명했다.
- 널리 퍼진 가정과 달리, 국가지출의 증가는 계획 시스템의 기업인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대기업 이사들은 정부 지출의 낭비에 반대하지만 국방비 지출은 여기서 교묘하게 빠져 있다.
- 이런 지출은 대기업이 장기 투자 계획을 세울 때 이윤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 뿐 아니라, 그 약속이 현금화(잉여가치의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해준다.
- 시장은 수직적 통합으로 대체된다. 계획 단위가 공급·판매 단위를 장악한다. 가격이나 수량 협상 위주의 거래는 계획 단위 내부의 이전으로 대체된다. 기업의 입장에서 시장이 제거되면 외부와의 협상은 순전히 내부 결정의 문제로 바뀐다. 이제 시장은 통제될 수도 있다. 계획 단위의 거래 상대방이 하는 행위의 독립성을 줄이거나 제거하면 된다. 한편, 구매와 판매 과정을 포함한 시장의 외관은 형식적으로 남아있다.
- 200대 제조업 기업이 산업 생산에 사용되는 전체 자산의 3분의 2를 보유하고 모든 판매·고용·순이익의 5분의 3 이상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이것은 미국 경제의 거대한 부문에서 대부분의 경제활동이 시장의 변덕에 종속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 대기업 사이의 경쟁은 상품을 더 싸게 판매하려는 기존의 경쟁과 다른, 비생산적 수단들로 이뤄졌다. 유통망 장악, 과장 광고, 정부 기관의 구매 담당자를 매수해 유리한 환경 조성 등.
- 갤브레이스는(그리고 자본주의를 사적자본의 자유경쟁으로만 규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이것이 자본주의의 성격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했음을 나타낸다고 봤다. 대기업 내부의 거대한 생산 영역은 가치법칙에 직접 종속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하지만 x-효율성(기업 내부 효율성)이 천차만별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많은 기업이 이상적 자본주의와 많이 달랐다. (TODO: 좀 더 자세한 해석 필요)
- 대규모 고정 투자가 이뤄져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고 이윤율이 낮은 부문에 있던 자본이 시장의 압력을 받는다고 해서 자동으로 그 부문을 빠져나가지는 않았다. 경영진이 자기가 지배하고 있는 시장에서 장기적으로 성장하기 위해 단기 이윤을 희생할 경우에는 시장에 남을 수도 있다.
- 가치법칙이 계속 작용했다면, 장기적으로 작용해 기업의 경쟁력을 약화시켰을 것이다. (그래서 시장에서 쫓아냈을 것이다.)
- 1970년대 초 황금기가 끝나고 경제 위기가 선진국과 제3세계 많은 지역에서 발생했다.
- 모든 곳에서 정부의 대응은 케인스주의 처방에 의존하는 것. 그러나 케인스주의 처방은 이 체제를 회복시키지 못했다. 오히려 마이너스 성장이 시작되면서 실업률이 치솟고 물가가 급등했다.
- 당시 경제 위기는 오일 쇼크(1973년) 때문인가? 유가 상승 때문에 감소한 선진국의 국민소득은 약 1%에 불과했고, 산유국으로 흘러간 자금도 대부분 국제 금융 시스템을 통해 다시 선진국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오일 쇼크 3년 전 '그로스 리세션(growth recession)'이 발생했다가 급속한 경기회복으로 인플레가 가속화됐다. 1973년 오일 쇼크는 경제 위기의 원인이 아니라 경제 위기의 정점이었다. 당시의 경제 통념은 케인스주의 처방으로 그런 충격을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지만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 케인스주의 처방들이 먹혀들지 않자 주류 케인스주의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현대 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말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프랜시스 크립스)
- 많은 케인스주의자들이 기존 사상을 버리고 밀턴 프리드먼과 시카고학파의 '통화주의' 이론을 받아들였다.
- 통화주의 견해는 정부의 경제행위 통제 시도가 문제였다고 봤다. "인플레를 유발하지 않는 자연적" 실업률이 존재하는데, 정부 지출로 이를 낮추려는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인플레만 불러일으킨다는 것. 국가가 할 일은 통화량이 '실물경제'와 같은 속도로 증가하도록 화폐 공급을 통제하는 것 뿐이라고 강조. 국가는 노동조합이나 국영기업에 의한 "비자연적 독점"을 분쇄하라는 것.
- 이전까지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국가가 개입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국가 개입만 폐기하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 통화주의의 정책: 높은 실업률, 복지 삭감, 노동 유연화, 노동조합 무력화
- 하지만 통화주의의 위기 대처 능력도 케인스주의보다 나은 것이 없었다. 통화주의는 1930년대까지 부르주아 경제학을 지배했던 신고전학파의 반복에 지나지 않았다. 신고전학파가 대공황을 설명할 수 없었듯이 통화주의도 1970년대 ~ 1980년대 위기를 설명조차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통화주의 정책들은 통화 공급조차 통제하지 못했다. M3이 6~10% 증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1982년에는 14.5%나 증가했다.
- 통화주의 정책은 지역 산업을 대거 파괴했고, 1980년대 초의 위기를 가중시켰고, 1990년대에 벌어진 또 다른 위기의 토대를 놓았다.
- 1970년대 중반에 통화주의를 받아들이며 케인스주의를 버렸던 일부 경제학자들이 1980년대 초에는 그 반대로 통화주의를 포기했다. 새뮤얼 브리턴은 "새로운 종류의 케인스주의자"를 자처했다. 레이건의 보좌관들은 통화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균형예산을 포기했다.
- 통화주의 정책이 실패하자 많은 주류 경제 이론들은 새고전학파 이론으로 옮겨갔다.
- 새고전학파는 1930년대 하이에크의 주장을 매우 많이 받아들였다.
- 새고전학파는 통화주의가 국가의 화폐시장 개입을 내버려 둔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프리드먼도 케인스와 마찬가지로 정부가 나서서 화폐 공급을 조절하라고 촉구함으로써 케인스와 똑같은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기업들이 '합리적 기대' 때문에 항상 정부 개입의 효과를 미리 약화시키기 때문에 국가 개입으로도 기업의 행동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없었다는 것이다.
- 새고전학파에 따르면 화폐 공급을 조절하는 정책은 적자 재정과 마찬가지로 황폐의 공급과 수요가 서로 적절하게 조응하는 것을 방해한다. "호황과 불황은 중앙은행의 기만적 행위 탓"이라는 것이다.
- 새고전학파는 심각한 국제적 경기 침체를 세 번이나 겪었는데도 자유방임 경제의 불안정성과 비합리성을 부인한 것이다. 이들이 지적 신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학술 경제학이 대부분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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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후반 짧은 호황기를 지나 1990년대에 초에 다시 심각한 불황이 시작되자 다른 학파의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이 주류 내에서 약간 지지를 얻었다. 이 학파는 불황-호황 순환을 불가피하지만 좋은 것으로 본 조지프 슘페터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오스트리아 학파'의 변형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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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낡은 생산 형태를 파괴하고 새로운 생산 형태를 위한 길을 열어주는 '창조적 파괴'의 기초 위에서 자본주의 체제가 중단 없이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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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케인스주의, 통화주의, 새고전학파, 오스트리아 학파의 변형판은 모두 30년의 장기 호황을 누리며 꾸준히 성장하던 이 체제가 또다시 위기에 빠지고 평균 성장률이 장기적으로 하락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 이윤율이 1960년대말 ~ 1980년대초에 급격히 하락했다.
- 노동자 투쟁 원인론: 일부 사람들은 1970년대 이윤율 저하를 국제 노동자 투쟁 탓으로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 통계를 분석하면 임금 몫은 증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방 경제가 1970년대 중반에 동시에 위기에 빠졌지만 각 나라별 노동계급의 사정은 다양했다. 당시 이탈리아·영국·스페인·프랑스에서는 노동계급 조직화 수준이 개선됐지만, 일본·서독에서는 그런 개선이 없었으며, 미국에서는 비농업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이 크게 하락했다.
-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론: 타당한 주장이다. 미국 경제의 주류 연구에 따르면 제조업 고용 노동자 대비 자본 투자의 비율이 1957
68년과 196873년 사이에 40% 이상 급증했다. 영국은 자본-산출 이율이 1960년~1970년중반 사이에 50% 증가했다. 미흘, 모즐리, 셰이크와 토낙, 울파 등의 더 최근 계산도 모두 노동 대비 자본 비율의 증가가 이윤율 감소의 원인이었다고 결론 내린다.
- 그런데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로 인한 이윤율 저하는 왜 이 시점에서 일어났는가?
- 군비 지출은 경제 대국들 사이에서 불균등하게 배분됐다. 1950년대 국가 산출량의 군비지출 비중은 미국(13%)과 소련(20%이상)에서 매우 높았고, 영국·프랑스에서는 그보다 낮았고, 독일과 일본에서는 훨씬 더 낮았다.
- 군비 지출의 불균등성은 대외무역이 낮은 수준이고 기업의 국제 경쟁도 치열하지 않았던 전후 몇 년 동안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소련 진영 밖에서 헤게모니를 굳히는 방안의 일환으로 서유럽 국가·일본의 미국 시장 접근을 허용했다. 그러자 군비 지출이 낮은 경제들은 그만큼 더 많이 투자해서 미국보다 더 높은 성장율을 달성했고, 미국의 생산성 수준을 따라잡았다.
- 각국의 자본 증가
나라 | 연간 자본 증가율 | 선진국 GNP 총합의 비중 |
---|---|---|
미국 | 3.5% (1948~1969) | 69%(1953) -> 48%(1977) |
일본 | 11.8% (1961~1971) | 3.6%(1953) -> 17.7%(1977) |
서독 | 9.5% (1950~1962) | 6.5%(1953) -> 13.2%(1977) |
- 이런 변화는 일본과 서독이 전 세계 수준의 막대한 군비 지출(특히 미국)에서 이득을 얻으면서도 자신들은 군비 지출을 위해 생산적 투자를 희생하지 않은 덕분이다. 모든 나라가 일본·서독 수준의 생산적 투자를 유지했다면 전세계에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급속히 증가해 이윤율 저하 추세가 나타났을 것이다. 비군사적 국가자본주의들은 매우 거대한 군사적 국가자본주의를 포함하는 세계 체제 안에서 움직인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면서도 위기를 겪지 않았다.
- 장기 호황 때의 세계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군비 지출로 설명할 수 있다. 여기서 일본·서독은 모순적인 요인이었다. 이들의 성공은 투자 가능한 생상물을 군비로 낭비하지 않는 경제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게다가 이들은 군비 지출이 높은 경제에도 압력을 가해 자원을 군비에서 생산적 투자로 돌리게 만들었다. (영국·미국 사례, 브레턴우즈 체제 무너짐: p263~264)
- 자본의 유기적 구성 증가는 평균이윤율은 낮추지만 처음 신규 기계류를 도입한 자본가의 이윤은 높여 준다. 일본과 서독은 자본 집약적 투자로 세계의 이윤율을 낮췄지만 세계의 이윤에서 가져가는 각자의 몫은 늘어났다. 여타 자본주의 국가들은 저마다 자국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높여서 경쟁력을 강화해야 하는 압력을 받았다. 그 결과 1970년대에 이윤율이 저하했다.
- 1973년에는 이윤율이 너무 낮아서 원료와 식료품 가격 급등(2년 전 호황의 결과)만으로도 서방 선진 경제들이 불황에 빠졌다.
- 정부가 재정 적자를 통해 수요를 부양하는 정책으로 대응했지만, 주류 케인스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기업들은 투자와 산출량을 늘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은 가격을 올려 이윤을 회복하려 했고, 노동자들은 물가 상승에 임금 인상 투쟁으로 대응했다.
- 정부와 중앙은행은 (1)화폐를 늘려서 기업이 가격을 인상해 이윤을 지킬 수 있도록 해 주거나, (2)단기금리를 인상해 화폐 공급을 억제해서 기업이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항할 수밖에 없게 해야 했다.
-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1970년대 중반에는 (1)을 추구하다가 1970년대 말에는 (2)로 이동했다. 그러나 정부가 노동계급의 저항을 굴복시키는 데 성공했을 때조차 투자가 회복되고 새로운 성장이 이뤄지는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0~1982년의 제2차 오일쇼크로 세계는 두 번째 심각한 경기 침체에 빠졌다.
- 결국 통화주의도 케인스주의보다 낫지 않다는 것이 입증됐다.
- 국가자본주의 전략은 축적의 지속이라는 점에서 한계에 직면했다.
- 국가가 투자 가능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당장은 이윤이 생기지 않는 분야로 돌리거나(일본은 이윤보다는 성장에 우선순위를 뒀다), 낭비적 생산(군비)에 투자함으로써 이윤율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있는 동안은 국가자본주의 전략이 효과가 있었다.
- 그러나 잉여가치의 일부를 빼돌리는 이 전략이 지속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이 두 조건이 장기 호황 자체의 모순된 발전 때문에 무너지고 있었다.
조건 | 1970년대 중반 상황 |
---|---|
이윤율이 급격히 하락하지 않음 | 이윤율이 너무 낮아져 비생산적 지출·당장 이윤이 나지 않는 투자가 추가 축적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
특정 재화 생산의 국내 경쟁력(국내 가치법칙)과 국외 경쟁력(세계 가치법칙)이 비교되지 않음 | 장기 호황의 동역학이 국민경제들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높였다. |
- 이제 갤브레이스가 언급했던 '기업이 성장을 위해 이윤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던 상황'은 사라졌다.
- 이런 특징은 미국의 국가독점자본주의만이 아니라 더 철저한 국가자본주의로 나아갔던 동유럽 블록과 제3세계 나라들에도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 소련식 경제는 비효율성이 심각하고 질 낮은 상품을 생산하지만 그래도 높은 수준의 성장을 무한정 유지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1970년대~1980년대까지도 대다수 좌파·우파 사이에서 이어졌다. 에르네스트 만델은 1970년대 중반에도 비자본주의 나라들은 경기 침체의 전반적 영향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했다.
- 1980년대말 소련 공산당 신임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 경제가 몇 년째 정체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소련의 공식 통계에는 이미 1960년대말에 성장률이 1/3 ~ 2/3 가량 하락하는 장기적 경향이 나타났다.
- 소련의 자본 대비 산출 비율
시기 | 자본 대비 산출 비율 |
---|---|
1951~1955 | 2.4 |
1956~1960 | 1.6 |
1961~1965 | 1.3 |
- 즉. 신규 생산물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불변자본의 양이 계속 증가했다. 이 양상은 성장률 하락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고, 또 성장률을 하락시킨 요인이기도 하다.
- 게다가 관료들에게는 실물 측면의 총생산이 증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았다. 관료들은 이런 실물 생산량을 국제적 경쟁자들이 생산하는 것과 비교하는 문제도 중요했다. 세계적 가치법칙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 그래서 일부 관료 분파가 생산물의 생산성과 품질에 대해 불평하면서 경제개혁을 실행하려는 시도가 거듭 나타났다.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0년대초, 흐루쇼프 집권 1960년대초,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집권하고 코시긴이 총리를 지낸 1960년대 말에 이런 시도가 있었다.
- 당시의 개혁에서는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상승하여 노동자들의 기여도와 생산성이 상승됐다. (1930년대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급속히 하락한 방식과는 달랐다.) 그러나 국제적인 경쟁적 축적 압력(소련: 군사적 압력, 동유럽: 군사적 압력 + 시장의 압력) 때문에 소비재와 식량 생산이 공업 투자의 필요에 희생되는 경향이 거듭 나타났다. 한 분야의 생산을 중단시켜 다른 분야로 자원을 이전하는 일이 반복되자, 낭비가 증대됐고, 노동자들의 사기는 떨어졌고, 관리직들은 가용 자원을 숨겨두는 현상이 벌어졌다.
- 이런 현상(관료적 비효율)은 소련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사방 기업 내부에서도 최고 경영자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소련의 중간 관료들과 같은 압력을 받는다. 시장 경쟁의 변화에 대응해 상사가 자신들에게 가하는 압력의 갑작스런 변화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류 경제학은 이런 문제를 거의 연구하지 않지만, 경영학 문야에서는 기업 내부의 문제를 다룬 자료가 많다. 서방의 일부 연구는 소련 기업들 사이의 관계에 배분적 효율성(가치법칙)이 적용된다고 결론 내렸다. "생산요소의 기업 간 거래는 시장경제에서만큼 효율적일 수 있다."
- 서방 기업들과 소련식 경제 모두에서 위기와 낭비를 만들어 내는 것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축적하고자 하는 추동력이다.
- 셀류닌(소련의 경제 저널리스트), 1987: 60여년간 소비가 축적에 종속되어왔다. 총생산물 중 소비로 가는 비중이 1928년에 60.5%, 1940년에 39%였지만 1985년에는 25%에 지나지 않았다. "경제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점점 더 경제 자체를 위해 작동하고 있다."
- 축적을 위한 축적은 궁극적으로 경제 위기를 발생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축적이 어느 시점에 이르면 축적하는 데 필요한 추가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보다 더 빨리 축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축적은 그로스만의 지적처럼 기존의 축적을 희생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자본의 과잉 축적") 이 때 자본가들에게는 공장 문을 닫고 일부 노동자를 해고하고 임금을 희생시켜 이윤을 회복하는 방법밖에 없다. 이런 조처들은 이미 생산된 상품 중의 일부가 판매(잉여가치의 실현)되지 않게 만들어 시장에서 재화의 전반적 과잉생산을 낳는다.
- 소련은 급속한 축적 노력 때문에 항상 주기적 경기후퇴를 겪었다. 그러나 장기 호황기에는 소련도 경기후퇴가 경제적 수축(실질적 불황)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성장 둔화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이런 불황을 피하기가 더 힘들어졌다.
- 야체크 쿠론, 카롤 모젤레프스 (1964): 과잉 축적이 경제의 나머지 부분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지적. 축적은 세가지 "장벽"에 부딛혔다.
- (1) 인플레 장벽: 투자가 너무 급속히 확대돼 보통의 인플레(국가가 투자 자금 마련하려고 통화 발행 -> 물가 인상 -> 생활수준 하락)나 숨겨진 인플레(재화 공급 차질, 암시장 창궐) 현상이 나타나는 것
- (2) 원료 장벽: 생산을 목표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투입물이 충분하지 않은 것
- (3) 수출 장벽: 투입물 부족분을 해외에서 수입해 메우려다가 외환 위기를 겪는 것
- 머지 않아 유보금이 완전히 고갈돼 축적을 지속할 수 없게 되면 엄청난 사회적 위기가 닥칠 것이다. "현재의 모순은 ... 지배 관료들의 계급적 목표(생산을 위한 생산)와 생산을 담당하는 기본 집단들의 이해관계(소비의 극대화) 사이의 모순이다.
- 쿠론과 모젤레프스의 분석이 부분적으로 입증됐다. 1970년에 정부가 생활수준을 떨어뜨린 과잉투자에서 비롯한 경제 위기를 해결하려고 시도하자 노동자들이 발트 해 조선소를 점거했다. 이로 인해 폴란드 지도자 고무우카가 사임했다.
- 하지만 새 지도부는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는 길을 발견했다. 국민경제의 협소함에서 비롯한 축적의 한계를 시장 경쟁에 기초한 세계경제로의 통합으로 극복. 서방과의 교역이 크게 증가하고 서방 은행에서 돈을 빌린 덕분에 수입이 1972년에 50%, 1973년에 89% 증가하면서 다시 호황을 누릴 수 있었다.
-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세계경제에 편입되자 세계경제가 침체할 때마다 폴란드 경제도 고통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전에는 국내 불황의 맹아가 실제 불황으로 발전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경제의 다른 부문으로 자원을 이동할 수 있었지만, 생산 투입물과 수출 소득을 세계 체제에 의존하게 되자 더이상 그렇게 할 수 없었다.
- 1980년~1982년에 전후 유럽 역사상 전례 없는 경제 위기가 있었다. 폴란드의 '순 물질 생산'은 3분의 1 가량 줄어들었다. 물가는 1981년에 24%, 1982년에 100% 상승했다. 실질임금은 1/5 가량 하락했다.
- 정권이 경제 위기의 부담을 노동자 대중에게 전가하려 하자 연대노조(Solidarnosc) 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저항이 분출했다. 이 사건은 소련 블록 전체에 경고 구실을 했다. 소련식 국가자본주의도 당시 서방의 국가자본주의를 강타한 유형의 경제 위기에 면역돼 있지 않았다. 머지 않은 미래에 소비에트 블록 전체에서 재앙적 위기가 닥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
- 1981년이 되자 폐쇄경제를 유지하느냐 개방하느냐 사이의 선택에서 답이 없었다. 폐쇄경제 유지할 경우 정체의 심화, 낭비의 증대, 대중의 수요 충족 불능, 상시적 노동계급 반란 위협을 의미했다. 경제를 개병할 경우 정체와 경기후퇴 경향이 심화하는 세계경제 리듬에 얽매임, 경기후퇴를 중단시킨 행정적 조치의 포기를 의미했다.
- 폴란드의 위기는 동유럽 모든 국가가 부딪힌 문제들을 해결할 길이 없음을 입증했다.
- 소련의 축적 수준은 지속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성장률이 둔화하는데도 축적을 유지하려다 생겨난 내부 문제들을 외부 요인들이 악화시킨 것이다.
- (1) 대외무역 의존: (1970년대 ~ 1980년대 초) 원유 판매 수익으로 해외에서 밀 수입 -> 대외무역 의존도 상승 -> (1980년대 중반) 국제 유가 하락 -> 소련 국내 경제계획에 문제 발생
- (2) 군비경쟁: 미국 레이건 정부가 군비 지출 늘려 헤게모니 강화 시도 -> 소련도 똑같이 행동하게 만드는 압력으로 작용
- 고르바초프의 집권은 권력자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인식했다는 신호였다. 고르바초프는 폴란드 같은 경제적·사회적·정치적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위로부터 개혁을 통해 그 체제를 구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경제 위기는 개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지점을 이미 넘어선 때였다.
- 1988~1989년 겨울: 경제적 혼란이 커지고 있었는데도 소련 정권에게는 이에 대처할 방안이 없었다. "상이한 경제 부문 사이의 (불)균형", "계획된 생산량을 공급하지 않고 버티거나 납품을 크게 줄인 많은 기업들", "신규 투자의 규모를 계속 늘리는 방안", "소비 시장에 대한 재화 공급" 악화
- 1989년 10월: "경제의 많은 부분이 위기에 빠졌고, 공급이 부족하고, 시장의 균형이 깨졌고, 새로운 관계가 등장하기도 전에 낡은 관계가 붕괴했고, 불확실한 전망과 품귀 현상이 확산되고 있다" 폴란드에서처럼, 경제적 위기가 정치적·사회적 위기로 확산됐다.
-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개혁에 반대하는 관료들을 고립시키기 위해 집권당과 언론 내부에서 논의를 제한적으로 개방(글라스노스트)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경제 상황 악화에 대한 오랜 불만과 분노를 터뜨렸다.
- 전례 없는 대중 시위와 소요가 아르메니아, 카자흐스탄, 발트 해 국가들,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아제르바이잔 등 비러시아계 소수민족 공화국들에서 벌어졌으며, 사회적 조건들에 대한 불만이 소수민족의 권리를 위한 투쟁과 결합했다.
- 동유럽에서는 거대한 대중운동이 일어나 소련의 동유럽 지배권을 깨뜨리면서 전반적 정치 위기를 심화시키고 소연방 내의 비러시아 공화국들에서 항의 시위를 촉발하고 소련 중앙정부의 지배력을 약화시켰다.
- TODO
- 소련이 붕괴하자 일본이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다. 1980년대 일본의 연평균 성장률은 4.2퍼센트에 달했다. 평론가들은 미래는 일본의 것이라고 예측했다.
- 1992년
1993년의 금융 위기로 일본은 '정체기'에 빠져들었다. 1990년2001년에 연평균 성장률이 0.9%로 하락했다. - 일본의 위기는 흔히 금융 시스템을 잘못 운영한 탓으로 돌려졌다. 세계 2위 경제 대국이 갑자기 성장 불능에 빠진 것이 별다른 교훈도 주지 못하는 우연 탓인가?
- 일본은 1950년대
1980년대말까지 노동 대 자본 비율이 급증했다. 1980년대에는 연간 4.9%씩 성장해, 미국보다 4배 빠르고 독일보다 70% 빨랐다. 그 결과 이윤율에 하향 압력을 미쳤다. 일본의 이윤율은 1960년대말1980년대말 사이에 4분의 3 가량 하락했다. - 1980년대 말까지는 이윤율 저하를 감당할 수 있는 듯했다. 국가와 은행은 민간 산업과 협력해 이윤율을 신경 쓰지 않고 성장을 유지할 수 있게 했다. 추가 투자에 쓸 수 있는 이윤이 대규모로 존재하는 한 일본 체제는 잘 작동했다.
- 이를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투자가 필요했다. 1980년대에 미국은 GDP의 21%를 투자했지만 일본은 31%를 투자했다.
- 일본은 이런 높은 수준의 투자를 지속하기 위해 대중의 소비를 억제했다. 실질임금을 억제하고, 국가가 제공하는 의료보험과 연금을 최소화해 개인 저축을 강제했다.
- 실질임금 수준이 낮다 보니 일본 기업들이 점점 더 빠르게 생산하는 신제품의 국내시장이 제약됐다. 이를 판매하기 위해 수출에 의존했다.
- 높은 생산성 덕분에 일본의 자동차와 전자 제품이 점차 미국 시장으로 침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 제품의 경쟁력을 미국 제품보다 낮추기 위해 일본에 엔화 평가절상을 용인하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이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수출량에 타격을 받았다. (TODO: 평가절상 때문에 수출품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아보기.)
- 이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 국가는 값싼 자금을 공급해 산업투자와 성장이 지속되도록 했다. 일본은 은행을 독려해서 대출을 크게 늘리게 했다. 그러나 은행 대출을 산업 발전으로 향하게 했던 메커니즘은 약화되고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일본 자본주의가 갈수록 세계 체제에 통합됐다는 점이다.
- 늘어난 은행 대출은 대규모 투기 자금이 됐다. 유동성의 폭발적 증가는 대기업이 담보물로 이용했던 부동산 가격 폭등에 일조했고, 이것은 다시 주가 급등을 부추겼다.
- 자산 가치가 치솟고 주식시장의 가치도 갑절이 됐다. 일본 기업의 순 가치가 미국 기업들의 가치보다 커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물 기준으로는 미국 경제 규모가 일본 경제의 2배였는데도 말이다. '거품경제'가 형성된 것이다.
- 거품이 지속되는 동안 일본 경제는 계속 성장했다. 심지어 거품이 꺼지기 시작한 뒤에도 은행 대출 증가 덕분에 1991년~1992년 내내 성장할 수 있었다.
- 거품이 꺼지자 잠시 후 은행 자체가 어려움에 처했음이 분명해졌다. 은행은 토지와 주식의 가격이 폭락하자 대출을 회수할 수 없게 됐다. 금융 시스템은 1990년대 내내 거듭된 위기 때문에 타격을 받았으며, 총 71조 엔(5천억 달러 이상) 정도의 부실채권을 손실 처리해야 했다. 어려움에 처하거나 파산한 기업들이 소유한 총액은 미국 정부 추계로는 80조 ~ 100조 엔, IMF 추계로는 111조엔에 이르렀다.
- 거품경제와 은행 위기 때문에 대다수 평론가들은 일본의 경제 위기가 일본 금융 시스템의 결함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 신자유주의 평론가들은 진정으로 경쟁적인 경제라면 은행들이 정밀 감시를 받았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쟁력'의 모든 기준을 충족시킨 것으로 알려진 미국 경제에서도 일본과 매우 비슷한 거품(2000년대 중반 미국 주택 거품)이 발생했기 때문에 그런 주장은 틀렸다.
- 경제 위기 책임을 국가 탓으로 돌리는 신자유주의 논리의 해결책은 하나다. 국가가 경제에서 손을 떼고 일부 대형 은행들이 문을 닫게 내버려두면 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일부 은행이 파산하면 그 은행에 돈을 빌려준 다른 은행도 파산하여 은행 부문 전체가 연쇄 붕괴할 우려가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그렇게 되지 않을거라고 가정하지만, 어떤 선진국도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에서 다른 국가들도 일본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 금융 위기가 일본 경제 침체의 궁극적 원인이라고 볼 수 없다. 1990년대에 비금융 기업들은 은행 대출 외에도 다른 자금원을 이용해서 활발한 투자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조달한 사업의 평균 수익은 낮았다. 생산적 투자는 실제로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자(위기를 심화시키는 방식으로)·케인스주의자(점진적 방식으로)의 금융 시스템 구조조정은 위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폴 크루그먼은 "구조 개혁이 어떻게 수요를 증대시킬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 실제로는 매우 모호하다"고 지적했다.
- 일본 경제 위기의 원천은 금융 시스템의 외부, 즉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있었다.
- 1980년대 말 일본은 이윤율이 너무 하락해 노동자 생활수준의 실질적 향상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따라서 국내 경제는 생산량 증가분을 흡수할 수 없었다.
- 대규모 축적이 있어야 생산량 증가분을 흡수할 수 있었지만 이윤율이 낮아 그럴 수 없었다.
- 일본 국가는 대규모 공공 건설 사업(다리, 공항, 도로 등) 같은 케인스주의 정책에 의존했다. 만성적 침체 상황에서 정부는 훨씬 큰 대규모 적자재정에 의존했지만 효과는 점점 줄어들었다. 일본의 공공사업 부문은 영국, 미국, 독일의 3배 규모로 커졌고, 노동인구의 10%인 700만명을 고용했으며, 연간 40조
50조 엔(GDP의 8%, 다른 신진국의 23배)을 소비했다. - 그러나 그 정도 규모도 제한적 경기 부양책이어서 이윤율과 투자의 간극을 충분히 메울 수 없었다. (p.287 도표)
- 일본 기업의 일부는 해외투자를 통해 위기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대다수 자본에게 해외투자는 해결책이 아니었으며, 국내 착취 강화로 버티려 했다. 노동계급은 생활수준 악화를 피하기 위해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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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위기는 그보다 2~3년 전 소련에서 발생한 위기와 달리 사람들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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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거의 모든 경제학자들이 간과한 일본과 소련의 공통점도 있다. 자본축적 수준이 하도 높아서, 더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축적 수준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잉여를 충분히 추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자본 그 자체가 자본축적의 장애물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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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적이 지속되려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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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1: 맹목적 경쟁을 통해 체제를 구조조정하면 새로운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체제를 구조조정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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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2: 장기 침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위험을 피해 안전하게 행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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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지배자들은 체제를 구조조정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서 다른 공화국들이 떨어져 나가 이미 절반이 된 경제 규모가 다시 절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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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지배자들은 안전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러자 15년 동안 침체를 겪으며 허약해졌는데도 여전히 문제의 해결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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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나라, 특히 미국은 이런 상황에 빠졌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 국가 지향적 이데올로기의 두 모델인 케인스주의와 스탈린주의가 몰락하자 제3세계 나라들의 전략에 영향을 미쳤다. 이미 문제점이 드러난 국가 주도 수입 대체 모델이 아니라 새로운 자본축적 모델을 추구해야 했다.
- 아시아에서는 중국 경제와 인도 경제가 1970년대 중반부터 정체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수입 대체 모델의 본거지였던 아르헨티나에서 결함이 드러났다.
- 아프리카에서는 국내시장이 협소해 산업 성장이 제약받았고, 제국주의 약탈로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아프리카 사회주의'를 주장한 사람들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세계시장에서 (신규 산업 설비 수입을 위한 수출 소득의 원천이었던) 원료와 식량 가격이 하락했다.
- 특히, 1974년 선진국에서 경기 침체가 시작된 뒤로 제3세계의 비산유국들은 원유 비용 증가와 1차상품의 수출 조건 악화 때문에 고통받았다.
- 아르헨티나, 브라질, 멕시코 등 보호무역 장벽으로 산업을 성장시킨 나라들은 실용적으로 외국자본과의 관계를 확립하기 시작했다. 원래 이 나라들의 산업 기반은 국가가 산업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으로 확립됐다. 그러나 산업자본가의 일부는 국민경제의 한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만 세계적 생산성 수준을 따라잡기 위한 자원과 기술에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은 다국적기업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다른 나라에서 스스로 다국적기업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 이런 추세는 오래전부터 세계 시장을 겨냥한 생산으로 빠르게 성장한 몇몇 나라의 성공으로 더욱 촉진됐다. 아시아에서는 한국·대만·홍콩·싱가포르(반공주의의 네 보루)가 있었고, 유럽에서는 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이 그랬고, 라틴아메리카에는 브라질이 그런 나라였다.
-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나라들은 브라질의 정책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칠레(1973년)와 아르헨티나(1976년)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후 해외 자본에 대한 시장 개방이 두따랐다. 국내시장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대중의 반발을 분쇄함으로써 처음에는 상당한 축적을 달성할 방법을 찾은 듯했다. '종속이론' 경제학자들이 자유시장 예찬자로 대거 전환했다.
- 1974년 이후 경제성장은 대외 차관에 의존하게 됐다.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외채는 1978년
1981년 사이에 거의 3배로 증가했다. 이것은 과도한 차관을 들여와 야심찬 성장 목표를 달성시킨다는 도박이었다. 제2차 오일쇼크(1979년1980년) 전까지 이 도박은 할 만했다. - 1980년대 초에 2차 세계 불황이 일어났다. 수출 시장이 위축되고 국제금리가 오르기 시작하자, 19780년대에 진 빚이 성장을 방해하고 불황을 초래하고 1980년대 내내 경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라틴아메리카 대륙 전체의 1인당 GNP가 10%나 하락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잃어버린 10년)
- 그러나 현지 자본가들과 주류 정치 세력들은 세계시장에 새로 개방한 것이 문제라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개방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 새로운 교리는 1980년대 말에 이르르면 라틴아메리카의 포퓰리스트 정치인들과 심지어 옛 게릴라들, 중국의 공산당 정치국, 인도의 국민회의당 지도자들, 아프리카의 옛 '사회주의' 지지자들, 이집트의 나세르 후계자들에게까지 받아들여졌다.
- 이런 전환이 항상 자발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IMF와 세계은행의 적극적 개입이 있었다. 그들은 빚으로 허덕이는 나라들에 마피아식 제안을 했다. 그들으 ㅣ부채 조정 프로그램은 채무국의 상황을 개선하는 것보다는 서방 은행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에 관련이 있었다.
- IMF와 세계은행의 제안을 받아들인 국가들이 제국주의에 굴복했다고 볼 수만은 없다. 그들은 그 자신이 국경 밖의 시장과 기술혁신에 접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선진국 자본의 요구 조건을 전면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부 자본은 정말로 국민국가를 뛰어넘어 발전하게 됐다. 예) 아르헨티나의 철강 회사 테크넷(->테나리스), 멕시코의 산업 재벌 알파, 유리 제조업체 비트로
- 때로는 선진국 자본과의 협력이 광범한 현지 자본에게 긍정적 결과를 제공하고, 중간계끕에게 모종의 기회를 제공하고, 심지어 노동자들이 산업 투쟁으로 생활수준을 개선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도 했다.
- 그러나 이런 협력은 너무 자주 외국 은행들에 대한 부채 증가로 귀결됐고, 이 부채는 결국 국민국가가 갚아야 했다. 그렇게 되면 다국적 기업의 혜택을 맛본 사람은 극소수였고,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조건은 열악해지거나 기껏해야 그대로였다.
- IMF와 세계은행의 '워싱턴 컨센서스', '신자유주의' 개념의 전제는 일부 나라가 세계 체제에 재편입돼 자본축적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면, 다른 모든 나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 그러나 현실은 사뭇 달랐다. 생산적 투자를 이끌어낸 지역은 일부 지역에 불과했다. 해외직접투자의 1/3만이 남반구의 '신흥 시장'과 옛 공산권 나라로 흘러들어갔다. 그 안에서도 50% 이상이 중국·홍콩·싱가포르·멕시코·브라질에 집중됐고, 25%는 말레이시아·태국·한국·버뮤다·베네수엘라·칠레·아르헨티나로 흘러 들어갔고, 나머지 25%가 175개국으로 분산됐다. 게다가 투자의 많은 부분은 신규 투자가 아니라 다국적기업의 현지 기업 인수였다.
-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특히 아프리카에서 이런 문제는 절박했다. 그런 지역은 보호무역 정책과 수입 대체 정책을 아무리 많이 해체해도 다국적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수 없었다.
- 수출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중국과 몇몇 나라들은 세계시장에 계속 진입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의 수출 지향 정책 때문에 외국산 소비재의 국내시장은 수출만큼 빠르게 증가하지 못했고, 이 나라들의 성장은 부분적으로 다른 남반구 나라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것이었다. 마치 제3세계가 둘로 나뉜 것처럼 보였다.
- 제3세계 국가를 운영하는 자들은 발전주의 전략이 성공했을 때조차도 흔히 불안하다고 느꼈다. 이들이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수준을 낮췄 높은 수준의 착취와 축적을 달성했을 때도, 다국적기업과 협상할 때는 여전히 약자의 처지였다. 다국적기업이 현지 기업들을 인수하면 현지 자본 투자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40%
50%에 달했고, 현지 국가의 의사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도 그만큼 커졌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 정부들은 다국적기업에 그런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그들의 국내 경제 규모가 작아서 다국적기업의 전세계 투자·판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2%밖에 안됐기 떄문이다. - 국가가 대중에게 약속한 것과 그들이 실제로 제공하는 것의 차이가 매우 커졌다. 강력한 탄압과 부패는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 됐다. 중간계급의 일부와 국가를 연결하고 이를 통해 노동계급과 농민을 국가와 연결해 주던 대중조직들이 껍데기만 남게 됐다. 억압적 국가는 취약한 국가가 됐고, 그 지배를 강화하기 위해 외국의 후원에 의존하게 됐다.
- 이 모든 일은 선진국에서 이윤율 문제가 발생하자 자본가들이 잉여가치를 차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다른 곳에서 모색하면서 벌어졌다.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자본가들은 그것마저 얻어내기로 했다.
- 제국주의는 체제 상층 수준에서는 자본주의 열강의 경쟁이었다.
- 제국주의는 더 낮은 수준에서는 제3세계 현지 지배계급에게 국내 자본가들을 위한 징세원 구실뿐 아니라 서방 은행에 진 빚을 갚고 다국적기업에 로열티를 지급하고 서방 투자자들에게 이윤을 제공하기 위한 징세원 구실도 하도록 강요하는 것이었다.
- '황금기'의 여파로 나타난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은 남반구 나라들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급성장하던 나라들조차 갑자기 외채 문제, 불황, 인플레에 직면할 수 있었다. 예) 1990년대초 멕시코, 1990년대말 인도네시아, 2000년대초 아르헨티나
-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처럼 국제 자본이 하찮게 여긴 나라들의 대다수 대중의 운명은 빈곤, 기아, (원료 지배를 위해 외국 기업들이 부추긴) 인종 갈등과 내전 등이었다.
- 마르크스의 설명이 20세기 후반에도 나타났다. 경제 위기 재발과 (민간자본이든 국가자본이든) 경제위기를 통한 자본의 구조조정.
- 주요 선진국 경제는 모두 세 차례 이상 실질적 불황을 겪었다. (예외: 프랑스·캐나다·일본)
- 소련 블록은 1980년대 말의 경기 침체 경향이 불황으로 바뀌었다.
- 체제 내에서 노동하며 먹고사는 사람들은 거듭되는 고통에 계속 시달렸다
- 경제 위기를 통한 구조조정으로 새로운 성장의 시대가 열릴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