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아시다시피 물리학은 변화가 적은 분야다. 법칙은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물론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 같은 새로운 분야가 나온다고 하지만 매년 새로운 물리학 이론이 나올 정도는 아니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뉴턴이나 맥스웰이 정립한 이론들을 배웠고, 물리학에는 정답이 있다. (아마도)
나이 서른에 올해 방송대에 입학하고 처음 법학을 공부하면서 여러모로 낯설었다. 그 중에서도 여러 법의 분야에 걸쳐서 반복해서 나오는 대상이 조문, 판례, 학설이다. 법에도 조문과 판례의 태도, 통설과 같은 정답이 있을지 모르지만. 정말 빠르게 변하고 애초에 물리학으로 치면 물리 법칙 같은 법조문이 있는데도, 수 많은 판례의 판시사항을 정답인 것처럼 외워야 하는 것도 신기하게 여겨진다.
여기서는 여러 사례를 들어 법학이라는 학문이 돌아가는 방식을 설명해보고, 법학을 공부하는 이유에 대한 나의 답을 해보려 한다.
나 같은 법에 문외한인 일반인이 법이라 하면 보통 떠올리는 것은 법조문이다. 특히 한국은 성문법주의 국가이다. 그래서 관습이나 상식보다는 문자 그대로의 법에 따라서 세상이 굴러가고, 법조문만 잘 외우면 되리라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데. 법은 추상적이며, 일상의 언어나 상식과는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노동법의 하나인 근로기준법 예시를 들어 이야기를 해보자. 근로기준법 2조(정의) 에서는 다음과 같이 근로자를 정의하고 있다
- “근로자”란 직업의 종류와 관계없이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사람을 말한다.
또한 비슷한 법안인 노동조합법 2조(정의)에서는 다음과 같이 근로자를 정의하고 있다
- “근로자”라 함은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임금ㆍ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를 말한다.
뭔가 말만 약간 다를 뿐이지 비슷해보인다. 그러니까 돈 받고 일해서 먹고 사는 사람을 근로자라고 하는 것인가.
그러면 이 상식적인 정의에 따라서 근로자와 근로자가 아닌 사람을 구분해보자.
예를 들어 식당 주인은 근로자가 아니다. 식당 주인은 물론 근로를 한다. 주문을 받는 것도 노동이고, 요리하는 것도 노동이다. 하지만 식당 주인은 음식을 팔아 영업 실적에 따라 돈을 벌지, 임금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정의에 따르면 모호해지는 게 많다. 또 학습지 교사는 근로자일까? 인터넷이나 옛 신문을 보면 학습지 교사를 모집하는 광고를 쉽게 볼 수 있다. 보통 학교나 학원 선생님들은 임금을 받고 학교나 학원이라는 사업에 강의라는 근로를 제공하니 근로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학습지 선생님은 애매하다. 학습지 선생님은 직접 영업을 뛰기도 하고. 학생을 가르치는 일도 한다. 광고를 보고 저 시켜주세요 하고 계약을 한다. 하지만 영업사원이 근로자이고 선생님도 근로자인 것처럼... 그러면 학습지 교사도 근로자일까?
그런데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학습지 강사는 근로기준법에서 정의하는 근로자는 아닌데, 노동조합법에 따른 근로자는 맞다고 한다.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는 타인과의 사용종속관계 하에서 노무에 종사하고 대가로 임금 기타 수입을 받아 생활하는 자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노동조합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 지는, 노무제공자의 소득이 특정 사업자에게 주로 의존하고 있는지, 노무를 제공 받는 특정 사업자가 보수를 비롯하여 노무제공자와 체결하는 계약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는지, 노무제공자가 특정 사업자의 사업 수행에 필수적인 노무를 제공함으로써 특정 사업자의 사업을 통해서 시장에 접근하는지, 노무제공자와 특정 사업자의 법률관계가 상당한 정도로 지속적⋅전속적인지, 사용자와 노무제공자 사이에 어느 정도 지휘⋅감독관계가 존재하는지, 노무제공자가 특정 사업자로부터 받는 임금⋅급료 등 수입이 노무 제공의 대가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
(중략)
① 업무 내용, 업무 준비 및 업무 수행에 필요한 시간 등에 비추어 볼 때 원고 학습지교사들이 겸업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워 보여, 참가인으로부터 받는 수수료가 원고 학습지교사들의 주된 소득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② 참가인은 불특정다수의 학습지교사들을 상대로 미리 마련한 정형화된 형식으로 위탁사업계약을 체결하였으므로, 보수를 비롯하여 위탁사업계약의 주요 내용이 참가인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다.
...
⑦ 비록 근로기준법이 정하는 근로자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특정 사업자에 대한 소속을 전제로 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고용 이외의 계약 유형’에 의한 노무제공자까지도 포함할 수 있도록 규정한 노동조합법의 근로자 정의 규정과 대등한 교섭력의 확보를 통해 근로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노동조합법의 입법취지를 고려할 때, 참가인의 사업에 필수적인 노무를 제공함으로써 참가인과 경제적⋅조직적 종속관계를 이루고 있는 원고 학습지교사들을 노동조합법상 근로자로 인정할 필요성이 있다. 또한 경제적 약자의 지위에서 참가인에게 노무를 제공하는 원고 학습지교사들에게 일정한 경우 집단적으로 단결함으로써 노무를 제공받는 특정 사업자인 참가인과 대등한 위치에서 노무제공조건 등을 교섭할 수 권리 등 노동3권을 보장하는 것이 [헌법 제33조]의 취지에도 부합한다.
이 판례를 보면 "타인과의 사용종속관계" 아래 있어야 한다며 법 조문에 전혀 존재하지 않는 조건을 추가하고 있다. 게다가 고용이 아닌 계약유형도 노동조합법의 규정과, 헌법 33조의 노동 3권을 고려하면 노동자인데. 이는 근로기준법의 노동자와는 다르다고 한다. 앞에서 본 근로기준법의 근로자의 정의만 생각하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내용이다.
뒤에 학설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이를 "사용종속관계설"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통설, 다수설을 대법원이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대법원의 입장" 또는 "판례의 태도"라고도 한다.
대법원은 이러한 법조문을 해석하는데 어려움을 느끼는 쟁점들을 구분할 구체적인 기준을 판시한다. 이러한 대법원 판례를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대법관이 참석해서 다수의견 뿐만 아니라 소수의견도 모두 판결문에 기록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도록 하고 있다.
제7조(심판권의 행사) ① 대법원의 심판권은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의 합의체에서 행사하며, 대법원장이 재판장이 된다. 다만, 대법관 3명 이상으로 구성된 부(部)에서 먼저 사건을 심리(審理)하여 의견이 일치한 경우에 한정하여 다음 각 호의 경우를 제외하고 그 부에서 재판할 수 있다.
- 명령 또는 규칙이 헌법에 위반된다고 인정하는 경우
- 명령 또는 규칙이 법률에 위반된다고 인정하는 경우
- 종전에 대법원에서 판시(判示)한 헌법ㆍ법률ㆍ명령 또는 규칙의 해석 적용에 관한 의견을 변경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는 경우
- 부에서 재판하는 것이 적당하지 아니하다고 인정하는 경우
지방법원이나 고등법원 같은 하급심 법원에서 판결을 하더라도 대법원에서 뒤엎으면 그만이기 때문에, 대법원 판결은 하급심을 구속하는 기속력을 가진다. 대법원이 파기해서 환송하면, 하급심 법원에서는 이에 따라야 하는 의무가 있다. 이는 법원조직법 8조에도 나와있다.
제8조(상급심 재판의 기속력) 상급법원 재판에서의 판단은 해당 사건에 관하여 하급심(下級審)을 기속(羈束)한다.
따라서 이렇든 저렇든 판사님들께서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것이기 때문에.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법원의 판결들을 공부하고, 학생들에게도 "판례의 태도는 이렇다"고 가르친다.
나에게 한 법학과를 나온 선배님께서는 "조문보다 판례가 중요하다"고 말하실 정도였고. 법 관련한 고시, 수험 쪽의 글들을 보면 조문과 판례가 전부라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학설은 나중이고 학설은 중요하지 않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판례도 허공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며. 이러한 대법원의 판례들은 법학자들이 만들어 놓은 학설들에서 유래한다.
학설은 법학자들이 만든 여러 법과 법 해석의 이론들을 이야기한다. 보통 다수설 혹은 통설이 있고. 소수설이 있는데. 이러한 학설은 여러 논문을 통해 발표되기도 하겠지만. 유명한 법학 교수들이 저술한 교과서들을 통해 표명되고 법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미래의 법관들에게 이어지는듯하다.
교과서를 쓰는 법학자들은 기존의 다른 법학자들의 교과서를 열심히 조사하여 무엇이 다수설이고 통설인지를 정리한다. 보통 ㅇㅇ이 다수설이라 하면 그 근거로 주석에 동의하는 학자들의 교과서들과 해당하는 페이지를 나열하는 전통이 있다.
각 교과서에 나온 교수의 입장을 "사견"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 민법학자 송덕수 교수는 자신의 책에서 사견을 밝힐 때 "생각건데"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는데. 여기서부터는 나의 사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통설에 자신이 동의하는지, 반대하는지 의견을 서술한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학계의 통설이 곧 대법원 판례의 태도로 채택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형법에서 범죄의 인과관계를 따질 때, 대법원은 "상당인과관계설"을 채택하고 있는데. 교과서를 저술하는 교수들은 "합법칙적 조건설"을 다수설로 채택하고 있다는 식이다.
여튼 앞에서 말한 "사용종속설"도 이러한 학설으로, 학계 다수설이었고, 판례에 의해 채택된 다수설이다. 원래 사용종속설은 독일의 노동법학자 휴고 진쯔하이머가 만들었는데. 원래는 사용자의 우월한 지위 아래 노동자는 취업해서 임금을 받지 않으면 굶어 죽어야 하는 종속적인 권력 관계를 근거로 민법의 예외인 노동법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개념이었다. 그러니까 사용자에게 지휘 감독을 받으며 이래라저래라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노동자이기에 더 보호가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그런데 당연하지만 오랜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발달하면서 노동의 성격도 변했다. 요즘은 여러 노동법 교과서(박은정, 이철수, 임종률 등)를 보면 이러한 종속노동의 개념이 한계에 이르렀고 수정 혹은 "폐기"해아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노동법은 근로자에게 유리한 여러 강력한 권리를 보장하고, 사용자에게는 무거운 의무를 지운다. 그러니 사용자들은 이러한 노동법을 회피하고 싶은데. 언뜻 노동자들의 자율을 존중하는듯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지배력을 행사하는 여러 꼼수들이 나타난 것이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학습지 교사라거나. "중개업자일 뿐"을 자처하는 여러 플랫폼들. 계약직과 외주를 찾아 일하는 여러 프리랜서 예술가들은 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고용 안정성은 보장 받지 못하면서 "지휘 감독 없이 자유"롭다면서 쉽게 계약 해지 당하고 해고 당하고 하는 것이다. 최근에 뉴진스의 팜하니 씨 같은 연예인은 근로자가 아니라서 직장 내 괴롭힘 법의 대상이 아니라는 고용노동부의 해석도 있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42부(부장판사 정현석)는 배달라이더 A씨와 A씨가 소속된 라이더 노동조합이 배달 플랫폼 업체 B사를 상대로 제기한 ‘근로에 관한 소송’에서 이같이 판결하며 B사 측 손을 들어줬다." [법원 "배달기사는 근로자 아니다"] 한국경제 2024.08.02
"고용노동부가 걸그룹 뉴진스 멤버 하니 팜이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근로기준법상 직장 내 괴롭힘 금지 규정을 적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노동부 “뉴진스 하니, 노동자 아냐”…‘직장 내 괴롭힘’ 진정 종결] 경향신문 2024.11.20
이렇듯 지금까지 판례에서는 상식적으로는 노동자처럼 보이는 이러한 이들을 모두 배제하여 왔다.
법은 정의를 추구하는 학문이기도 하며. 무엇보다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이 이렇듯 불합리한 법의 피해자가 될 때, 뭐 그냥 돈 벌기 위해 법을 공부한다 해도 법조문과 대법원의 판례가 나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이러한 법을 바꾸기 위해 노력한다. 학설을 만들거나 공부하게 되는 것이다.
학자들은 판례 평석이라 해서 논문이나 교과서, 기고문, 각 학회에서 내놓는 판례 선집 (노동판례백선, 형법판례 150선) 등을 통해서 판례에 대한 입장을 밝힌다.
예를 들어 민법학자 송덕수 교수의 [민법 핵심판례 240선]을 보면 판례들을 소개하고 해설을 달면서 마지막에 '논평'이라 하여 "본 판결은 타당하다" 부터 "본 판결은 받아들일만 하다 단, ㅇㅇ한 부분은 어떻게 하여야 한다", "본 판결의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 심지어 "지극히 부당하다"고 강경하게 의견을 내는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학자와 법 실무자들의 입장은 대중과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에게도 영향을 준다. 법관들은 법을 해석할 뿐 입법할 권리는 없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법을 만들면 바뀐 법조문에 따라서 판결의 지형도가 바뀐다. 예를 들어 교직원 노동조합은 원래 불법으로 판결해왔다. 우리 헌법에 교사 등 공무원의 노동권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서 교원 노조를 인정하기로 합의하고, 1999년에 '교원의 노동조합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교원 노동조합은 합법이 되었다.
또 다른 경우는 헌법재판소의 위헌법률심판이다. 헌법재판소가 어떤 법률이 헌법에 반하고 위헌이라고 판시하면, 법률을 개정하고 이를 근거로 대법원도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낙태죄가 헌법 불합치로 폐지된 것과 같은 예시도 있겠다. 수 많은 이들이 헌법 재판소의 문을 두드리고. 몇 번이나 헌법재판소에서 기각했던 판결들도, 시대가 변하고 헌법재판관의 구성이 바뀌면서 뒤집히기도 한다.
또한 대법원도 다르지 않다. 대법관의 구성도 바뀌고 시대가 변하면 판례의 태도도 자연스럽게 바뀐다. 그래서 어떤 판결을 볼 때 이 법관은 보수적인 법관인지 진보적인 법관인지. 어떻게 판결을 내리는 경향이 있는지 본다. 그러면 소수의견이었던 것이 나중에 다수의견이 되어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형법에서 대법원은 원래 범죄 후 법령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바뀐 경우에도 입법 동기에 따라 신법을 적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동기설을 채택하여 왔는데. 이는 조문만 보면 이해가 안 되는 해석이다. 형법 1조 2항에서는 입법 동기에 따라 이 조항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② 범죄 후 법률이 변경되어 그 행위가 범죄를 구성하지 아니하게 되거나 형이 구법(舊法)보다 가벼워진 경우에는 신법(新法)에 따른다.
하지만 '대법원 2022. 12. 22. 선고 2020도16420 전원합의체 판결' 에서 동기설을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예외 없이 형법 1조 2항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렇듯 세상은 변한다. 법학은 더 빠르게 변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법학에는 계속 새로운 법조문, 판례, 학설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서 물리학 교과서는 40년 넘게 신판도 나오지 않고 그대로 쓰이는 반면에. 법학 교과서는 거의 매년 개정판이 나온다. 서문에서 법학자들은 중요한 판결도 많이 나오고, 새로 개정된 법도 많아서 열심히 반영했다는 말을 한다. 여러 법학 관련 학술지에도 유튜브 등에서는 매년 중요한 판례를 평석하고, 바뀐 법안을 정리해서 소개하는 글과 영상이 올라온다. (ex 2023년 민법 중요 판례 평석)
예를 들어 2023년 초에 나온 방송대 형법총론 개정판 교과서와 강의에서는 동기설이 판례의 태도라고 가르치는데. 동기설은 폐지되었기 때문에, 강의 자료실에 가면 학생들이 동기설이 폐지되었는데 시험에 나오는지 묻는 걸 볼 수 있다.
방송대에서 노동법을 가르치시는 박은정 교수님도 책의 서문과 1강에서 노동법은 매우 변화가 빠른 분야이므로 항상 최신 법령과 판례를 확인하여야 하며, 자료실을 통해서 이러한 변화를 정리해서 소개하겠다고 이야기를 하신다.
발제를 맡은 박은정 한국방송통신대 법학과 교수는 기존의 노동법 인식을 바꾸고, 일하는 사람을 위한 노동기본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박은정 교수는 "지금 우리나라의 노동법은 1800년대 말 독일의 노동론을 기초로 하고 있다. 당시엔 '종속성'이 노동법의 대상인 것이 당연했지만 100년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은 종속성이 강한 노동자도 있고, 아닌 노동자도 있어 그 인식을 바꿔야 할 때"라며 "근로자성 지위를 판단함에 있어 법률상 추정이 중요하고, 입증책임을 근로자가 아닌 사용자에게 지우게 하면 노동자 권리 보호에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프리랜서,플랫폼 노동자 보호하려면 "노동기본법 제정 필요" 월간 노동법률
이제 방송대 노동법 교과서에 나오는 다음 문단을 이해할 수 있다.
"노동법은 '종속노동'의 보호를 위해 만들어졌고, '종속노동'에 적용되기 위해 작동하여 왔지만, 새로운 노동법의 탄생을 요구하는 시대적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노동법Ⅰ] 7페이지. 박은정, 박귀천, 권오성 공저 2025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문화원
채점위원은 “모든 문제는 기본적으로 노동법이론과 대법원 판례의 법리를 얼마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지를 평가할 목적으로 출제되었다”면서 “사안에 대한 법리적 검토나 구체적인 풀이 없이 단순한 암기 위주의 총론적 서술을 한 학생들의 경우에는 본인이 예상한 만큼 좋은 점수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 [특집] 노무사 2차, 채점위원은 이렇게 평가한다 ① 노동법
법을 공부하다 보면 곳곳에서 리걸 마인드(legal mind)라는 말을 본다. 언뜻 이런 것을 단순히 논리학적인 사고 같은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논리학을 다양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왔는데. 법학은 단순히 암기 과목도 아니고 수학적 논리와도 다른 법학만의 독특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논리학에는 모호함이 없다. A는 B이고 B는 C라면 A는 C인 것이다. 이는 논리학의 기본 전제와 공리에서 1+1=2 처럼 연역적으로 도출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것처럼 법은 그렇지 않다. "상당한 지휘 감독"이 있으면 근로자라는데. 그러면 무엇이 상당한 지휘 감독인가. 여러 판례와 사례들을 봐도 명확하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애초에 법조문에 없는 어떠한 학설이나 기준이 무슨 근거로 갑자기 대법원 판례에 적용되는 것인지. 여기에 어떤 근거가 있는지도 모른채 "이게 다수설이다", "판례의 태도는 이렇다" 하고 제시되는 설명들을 보면서 납득하기 어려웠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법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차이가 있다. 수학은 대법관이 바뀌었다고 결론이 뒤집히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국회의원 마음대로 1+1=3 이라는 법을 제정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법을 공부하는 의미가 있다. 법은 수학과 달리 인간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은 방송대에서 헌법을 가르치시는 이민열 교수님의 책을 읽어왔다. 늘 이야기하시듯이 단순히 나의 자의적인 판단으로 "내 생각은 다른데요?"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법리와 법 해석이 등장하는 것이다. 결국 구체적인 법리, 근거를 제시하는 법 논증을 통해 많은 이들을 납득 시키지 못한다면 법도 법 해석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이는 단순히 말빨로 사람들을 설득하는 선전과 다르며, 진리를 찾는 걸 목적으로 하는 논증대화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수험 법학에 대한 글을 보면 조문과 판례를 외우라는 이야기들이 많이 보인다. 학설은 중요하지 않고, 학설은 나중에 공부해도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판례를 외울 때에도 단순히 판시 사항을 기계적으로 외울 것이 아니라. 여러 법관들의 의견과, 그러한 의견이 나온 배경, 이러한 전제들은 어떤 근거로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를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 법학자들이 말하듯이 하듯이 "이 판례는 지극히 부당하다"라고 의견이라도 밝힐 수 있으니까.
나 역시 아마 노무사 시험을 보게 되리라는 생각을 한다. 최근에 노무사 1차, 2차 교재와 법학 적성 시험 교재를 구매했다. 방송대 교수님들은 방송대 교재 말고도 다른 교수님이 쓴 책도 보고 판례도 찾아보라고 하시기에. 두꺼운 다른 교수님이 쓴 교과서도 사고, 판례집, 사례 연습 책도 구매했다.
나이 30이라는 어린? 나이에 다시 법학을 공부하러 방송대에 들어온 것은 노무사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살면서 여러 부당한 일들을 봐왔고. 그저 기성의 논리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 글에서 굳이 노동법을 예시로 든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3학년이 아니라 1학년으로 들어왔다. 재미있게도 방송대 법학과의 시나브로 스터디에 들어가니 나는 막내였다. 50대에도 60대에도 법을 공부하기 시작하고, 평생 공부를 계속하는 분들이 있다. 앞으로 인생은 길기 때문에 길게 내다보고 하나씩 공부해나가려 한다. 노동소법전을 사서 하나씩 읽어보고 판례도 전문과 사실관계를 다 읽어보고, 교과서를 읽어보고, 노무사 문제도 풀어보고, 이런저런 논문도 보고, 박은정 교수님이 이곳저곳에 기고하신 글도 찾아보고, 같이 논문을 쓰신 교수님이나 참고문헌도 고구마 줄기 캐듯 찾아보고 있다.
물론 우리 인생은 바쁘고 빠르게 기본서를 읽어보면서 큰 흐름을 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은 한다. 이런 식으로 모든 걸 공부하면 몇 년 안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일단 방송대 강의와 시험을 최소한의 기준으로 하고, 이런저런 심화학습은 보너스로 생각하려 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법학을 공부하고 싶은지는 앞으로도 계속 찾아가야하리라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법을 공부하시는지 다른 분야를 공부하시는지는 모르나. 각자의 분야의 특이한 사고방식을 잘 이해하고,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와 가치를 잘 찾아가시기를 바란다. 하물며 시험을 보는 게 목적이라 한들, 시험이 끝난 뒤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걸 이제는 알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