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비폭력 대화 교육원에서 NVC 2 교육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계속된 "내가 어디에 속하고 기여하고 싶은가?"하는 고민에 답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은 복잡하고. 우리는 이 복잡한 세상에서 단순하게 누군가를 나쁜 놈 만들고, 나르시스트로 만들고 분노하기에 앞서. 사람들을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자유롭고 평등한 이들의 민주주의도 있고. 과학과 교육의 미래도 있지 않을까요.
비폭력 대화에는 여러 전제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내가 미워하고 틀렸다고 말하는 행동조차, 보편적이고 누구나 가진 욕구의 왜곡된 수단이고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제 삶의 대부분은 투쟁이었습니다. 그 투쟁은 왕따나 가난, 경제위기, 가정폭력, 닫힌 사회의 문제, 군대의 부조리, 채식주의자로 경험한 소수자의 삶 어쩌구저쩌구 등으로 요약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 길들을 걸으면서 제가 피해자라는데 골몰할 수는 없습니다. 따뜻한 사서 선생님을 따라 머물렀던 도서관에서 읽었던 수 많은 책들을 기억합니다. 나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들에 공감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책 속에는 성소수자들이 있었고. 철거민과 노동자들이 있었고. 전태일이 있었고. 지구 반대편의 전쟁과 가난이 있었고. 공장식 농장에서 죽임 당하는 동물들이 있었고 그랬습니다. 죽고 싶었던 시절에는, 내가 그래도 살아서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이 제가 살아남고 죽지 않을 유일한 이유였던 때도 있습니다. 상담을 받으며 이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항상 울게 되는 기억들입니다.
그때 저는 과학(특히 물리학)과 정치철학에 빠졌고. 제 인생에는 두 가지 질문이 따라다녔습니다. "왜 어떤 이는 성공하고 어떤 이는 실패하는가?" "진리란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닿을 수 있는가?" 이 두 질문은 초록색 수첩에 "혁명가 정신"을 쓰고 다녔던 그 시절부터 멈추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다시 비폭력 대화의 전제로 돌아가봅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상에 선과 악이나, 진리와 거짓으로 나뉘는 단순함이 없다는 깨달음에서 시작합니다. 저는 버릇처럼 "세상은 복잡하고 단순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합니다. 마셜 로젠버그는 관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웬들 존슨이라는 언어학자의 변화와 함께 살아가기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복잡하고 변화하는 세계를 고정적이고 단순화하는 언어가 우리를 비극으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낙인 찍고 혐오하기를 즐긴다고 합니다만. 이게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지, 요즘 더 심해지고 있는지는 저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제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독교인이며 페미니스트인 여성이고 트랜스젠더들을 경멸하고 혐오합니다. 제가 퇴근할 때마다 "고생했어~"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던 군대의 간부님은, 여군 동료를 비방하고 제가 채식주의자였다고 하니 "채식주의자는 미친 놈들"이라 했습니다. 제가 코칭했던 어떤 분은 하루는 갑자기 저에게 중국인들이 범죄를 일으킨다고 말했습니다. 민주당 지지자라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은 뒷전이라고 선거에 승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말하고. 중국과 북한, 소련의 현실 공산주의는 관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이 되는 구조로 변질되었죠. 매일 퇴근하는 길에 저는 이승만 동상이 세워진 자유회관을 지나고, 오늘 아침에는 친절한 금자씨의 배우이기도 한 이영애 씨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자유대한민국 초석 다진 분"이라며 후원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전 직장을 그만두게 만든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유능하고 좋은 사람처럼 보였고... 그 사람이 제 동료에게 윽박 지르고 화를 내며 자기 발로 회사를 나갈 것을 강요했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요즘 그런 변형된 말이 많습니다. 썩은 사과를 잘라내고 배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자존감이 낮은 열등감 높은 사람들이었지만, 요즘은 사이코패스나 나르시스트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왕따로 살아봤고. 누굴 제가 배제할 수 있는 처지였던 적은 별로 없습니다. 그건 마치 장애인인 사람에게 너를 차별하는 사람들과 같이 살지 말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의미 없는 조언이죠.
저는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선한 이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채식주의자로 살아가던 시절, 저는 소수자란 무엇인지 경험했습니다. 세상에 장애인들의 인권을 신경 쓰는 이가 거의 없는 것처럼.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물권에 관심이 없는 걸 넘어 적대적입니다. 만약에 제가 동물권에 대한 이해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많은 이들과 거리를 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채식주의자들은 그러면 완전한 사람인가요? 페미니즘을 경멸하고 성폭행을 저지르는 남성 운동가. 비과학적인 사이비 의사들에게 넘어가고 그들의 잘못된 주장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사람. 한 채식주의자는 제가 TRPG를 하던 시절 저에게 누명을 씌우고 만장일치로 추방한 이들 중에 하나였습니다.
지금도 제가 믿는 것은 세상에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으며. 사람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무지하고, 악하며, 한편으로는 선하기도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마음의 불편을 안은 채, 사람들은 경멸하고 나는 선하고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살아가야 할까요? 하지만 도덕적인 우월감을 가지기에는 저는 이제 고기를 먹으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제가 사람들을 용서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저는 늘 그렇듯이 화가 많고. 분노와 함께 살아갑니다.
사람들과 거리를 둔다고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화를 낸다고 변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때마다 변하지 않는 사람들을 나쁜 사람들이라 비난하면서 세상을 계속 살아가는 것도 지치고 힘든 일입니다.
제가 원하는 삶은 나 혼자 편안한 삶이 아닙니다. 나 혼자 눈을 감을 수도 없으며. 수 많은 이들이 고통 받는데 나 혼자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이들이 함께 잘 살아가는 삶입니다. 저는 변화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다시 생각하게 하고,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싶습니다.
정의론을 쓴 철학자 존 롤즈는 현대 입헌 민주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다원주의의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합니다. 서로 다른 포괄적인 독단(comprehensive dogma)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것은 우리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죠.
나만이 진리를 알고 있다는 오만은, 쉽게 엘리트주의로 사람들을 이끕니다. 헛소리 하는 사람들을 몰아내고, 교육 받고 자격 있으며 생각하는 사람들이 권력을 잡게 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 정의롭고 진리를 아는 이가, 트랜스젠더를 배제하는 페미니스트일지 누가 알겠습니까? 한편으로는 트랜스젠더를 핑계로 여성을 혐오하는 사람일지 누가 알겠습니까? 노동 변호사 출신의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대통령은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선택지였을지 모릅니다만. 세상에 완벽한 이는 없고, 완벽한 영웅도 없다는 걸 우리는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까요?
조직 심리학자이자 베스트 셀러 저자인 애덤 그랜트는 그의 책 '싱크 어게인'에서 나와 다른 이들의 생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이야기와 연구들을 전합니다. 그는 칼 로저스의 인간 중심 접근을 계승하고, 잘 연구된 근거 기반 방법론인 '동기 면담'을 소개합니다. 칼 로저스는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는 비지시적인 상담 방법으로 유명합니다. 동기면담은 처음에 중독 치료에서 시작했습니다. 동기 면담에서는 담배를 끊으라거나 술을 마시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우리는 사람들에게 너는 틀렸다고. 변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자극을 줘야 사람이 변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 연구가 말해주는 바는 다릅니다. 사람들에게는 자율성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명령에 저항하고, 이를 동기면담에서는 "교정 반사"라고 부릅니다.
역설적이게도 사람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다시 생각하게 돕고, 자신을 낮추고, 상대의 선택권을 강조할 수록... 사람들은 변화를 스스로 선택합니다. 동기면담은 중독치료 뿐만이 아니라 교육과 운동, 백신 접종에서 환경 운동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분야에서 사람들을 변화로 초대하는... 과학적으로 가장 잘 입증된 방법입니다.
다시 또 비폭력 대화로 돌아옵시다. 세상에는 수 많은 방법들이 있고. 비폭력 대화는 그 수 많은 방법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비폭력 대화는 근거 기반으로 가장 잘 연구된 방법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저는 왜 동기면담이나 다른 과학이 아니라, 미심쩍은 영성과 세속 윤리, 믿음을 이야기하는 마셜 로젠버그의 비폭력 대화로 돌아왔을까요?
그 이유는 여럿입니다. 하나는 비폭력 대화가 말하기를 먼저 가르치는 방법이며. 자신의 방법이 도그마가 되는 것을 경계하고 대비하며, 비폭력 대화가 실패할 때에 가장 놀라운 경험을 주는... 신기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마셜 로젠버그는 칼 로저스의 제자입니다. 보통 비폭력이라거나, 공감이라 하면 사람들은 들어주는 걸 생각합니다. 여러 심리치료의 방법들을 보면 하물며 동기면담에서조차 치료자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온전히 상대에게 집중하면서, 치료자 자신은 어느샌가 사라집니다.
하지만 나의 욕구와 감정을 객관적인듯 보이는 방법 뒤에 숨길 때 두 가지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를 기만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요즘은 심리치료도 자본에 포획되어 돈 벌이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마음챙김의 배신' 같은 책에서 말하듯이, 모든 문제는 개인의 정신 건강 문제로 환원되고는 하며. 사회 구조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문제들이 정말 단순히 서로 혐오하지 않고 사랑하면 해결되는 문제일까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서 적응적인 사람이 되라고 말하는 심리치료나 방법론은... 사람들을 침묵 시키고 진실에서 눈 가리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방법들은 어느새 나를 착취적인 위치에 놓게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비폭력 대화가 똑같이 좋은 의도를 가진 사람들끼리만 효과적인 방법이라며, 나르시스트에게는 비폭력 대화를 하면 안 된다고 화를 냅니다. 비폭력 대화는 사람들에게 쿠션어를 가르치는 것에 불과할까요?
하지만 비폭력 대화에서는 말하기를 먼저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책임을 지지말라고 말하며.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느니,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말하고 구체적으로 부탁하고 요구하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얄미운 사람이 되라고 말이죠.
로젠버그는 치료사 역시 자신의 욕구를 숨기지 말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좋다고 말합니다. 풀소유 스님의 명상 사업처럼 돈 벌이를 위해 상대를 이용하면서도 상대를 위한다고 거짓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게 정말 상대방을 위하고, 진실한 행동인가요?
마셜은 학교에서 갈등 중재 프로그램을 가르치고, 흑인 민권 운동과 협력하면서 NVC 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항상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이야기합니다. 사회 변화와 마음챙김, 비폭력 대화에 대해 책을 쓴 오렌 제이 소퍼는 마셜이 한 워크숍에서 했던 이야기를 전합니다.
"내가 비폭력대화를 사람들이 덜 우울하고 가족과 잘 지낼 수 있게 해주지만, 동시에 세상의 시스템을 빠르게 변화시키는데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하도록 가르치지 않는다면, 나는 문제의 일부가 될 겁니다. 내가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시스템에서 지금 이대로 행복하게 살게 만든다면, 나는 NVC를 마약처럼 쓰고 있는 셈입니다."
마셜 로젠버그
상담과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그렇듯, 비폭력 대화 교육을 받으러 온 사람 중에도 여성 분들이 많습니다. 남자는 저뿐이었을 정도로요. 로젠버그는 사회가 특히 여성들에게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억압하도록 교육하고 강요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각은 해방으로 이어지고. 제가 만난 분들은 '듣기'보다는 '말하기'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직장 상사에게, 가족에게, 학생들에게, 환자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법에 대해 배우셨다고 말이죠.
다시 말하지만 비폭력 대화는 실패하는 순간에 가장 신기한 방법론입니다.
마셜은 지속적으로 비폭력 대화가 실패하고 거절 받고 오해 당하는 순간들에 대해 말합니다. 마셜은 수 많은 위험한 갱단과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그들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하고 다녔음에도. 죽임 당하지 않고 자식과 손주들을 보며 늙어 죽었습니다.
그의 삶은 폭력 앞에서도, 그들의 고통과 욕구에 공감했던 비폭력 대화의 증거였습니다. 마셜은 예시로 한 분쟁 지역에 비폭력 대화 강의를 갔을 때의 이야기를 합니다. 교육이 으레 그렇듯 입바른 소리를 하고. 길거리에 다친 이들과, USA가 적힌 무기 파편이 굴러다니는 동네에서. 이슬람 교도들은 마셜을 욕하면서 살인자라고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솔직히 좀 억울한 일입니다. 마셜이 사람을 죽이진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가 정말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마셜은 그들의 고통과 욕구에 귀를 기울이기로 합니다. 수업은 중단되고, 마셜은 그 분에게 공감을 이어갑니다. 그들은 집을 원하고 자주적인 나라를 원하며... 가족과 아이들은 27년 간 여기서 고통 받으며 살아왔고, 아이들은 병들어 학교에 가지 못하고, 학교에는 책 한 권조차 없습니다. 어느새 화는 풀리고, 사람들은 마셜을 저녁 식사에 초대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벌어지는 비극을 보면서. 이스라엘인들의 분노에 대해 생각하고. 자칭 급진 페미니스트 지정 성별 여성들의 트랜스젠더를 향한 분노를 생각합니다. 그들은 왜 마셜처럼 상대의 고통을 들어주지 못했을까요? 자신의 억울함에 빠져, 타인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을까요? 그들은 오히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트랜스젠더들을 가해자이자 악당으로 낙인 찍고 자기들이 피해자라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마셜은 책 전체에 걸쳐서 이런 식으로 비폭력 대화가 실패하는 순간들을 예시로 듭니다. 보통 비폭력 대화가 성공하고 행복한 순간들에 대해서만 말할 법도 한데. 마셜의 사례들은 대부분 실패로 시작합니다. 마셜은 오해 받고 공격 받습니다. 그는 성인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이기에, 이런 순간들이 마냥 편하고 쉽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마셜은 하루는 "당신은 우리가 본 강사들 중에 가장 오만한 사람!"이라고 욕을 먹습니다. 그 분은 왜 이렇게 말하는 걸까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분은 이런 비폭력 대화가 매우 어려운 일인데도... 폭력적이라 낙인 찍고 비폭력적으로 말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처럼 들렸던 모양입니다. 자기에게는 매우 쉽다는 듯이요.
마셜은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하려 합니다. 이해가 끝나자 마셜은 말합니다.
"저도 이 방법이 어렵다는 것을 자주 느낍니다. 이 워크숍을 계속하다보면 선생님께서는 저 자신도 때로는 이 방법을 적용하기가 정말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감했던 때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실 겁니다. 하지만 힘들어도 제가 계속 노력하는 것은, 이 방법을 사용할 때 다른 사람과 가깝게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대화를 한다는 사람들도 연결하기 위해서보다는, 나의 도덕적 명분으로 쓰고 싶어할 때가 많습니다. "너는 비폭력 대화를 하지 않으면서 왜 나에게만 강요하냐!"거나, 내가 비폭력 대화를 했는데 효과가 없는 것 같으면 "상대는 폭력적으로 말하는데, 나는 왜 비폭력으로 말해야 해요?"하고 불만을 가지기는 매우 쉬운 일입니다.
예전에 트위터에서 어떤 분이 비폭력 대화에 대해 경험하신 이야기를 해주신 적 있습니다. 그 분은 너무 놀라웠던 것이 "너는 왜 비폭력 대화를 하지 않느냐!"고 비폭력 대화를 한다는 사람이 자기에게 화를 냈다는 것이죠. 그 분은 비폭력 대화가 사이비 종교나 다름 없다고 화를 내셨어요.
이 사례가 재미있는 이유는 저도 여러 마음에 안 드는 악한 행동을 한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비폭력 대화라도 좀 읽어보시죠"하고 화를 내고는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분들 중에 비폭력 대화를 읽게 되신 분은 하나도 없었어요.
더 재미있는 이유는 비폭력 대화를 연습한다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게 흔한 일이라, 책에서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강요는 두 가지 방향으로 이뤄집니다. 하나는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게 강요하는 것이죠. 후자부터 좀 생각을 해봅시다.
비폭력 대화는 서로의 자율성을 중시합니다. 비폭력 대화를 하는 이유는 비폭력이 옳고 폭력이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으로 살아가고 싶기 때문이죠. 그러니 내가 비폭력 대화를 하지 않는다고 누가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건 좀 이상한 일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나, 운동가들이나 피해자들에게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라며, 극단적이고 폭력적이라고 낙인을 찍고는 합니다. 하지만 마셜이 어떻게 했는지를 돌이켜 봅시다. 마셜은 그들이 폭력적이고 효과적이지 않다고 말하기보다는 그들에게 공감하기를 선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공감 받고 싶고 이해 받고 싶은 것이 사람의 당연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상대가 이런 공감을 해줄 마음의 여유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가 피해자이고 억울하다는 마음에 빠진 이들처럼요.
비폭력 대화에서는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게 하고. 자기 공감을 하는 법을 연습하고. 서로 역할극을 하면서 대신해서 공감을 주고 받는 연습을 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비폭력 대화라도 좀 읽어라!"하고 화를 냈던 저의 마음도 공감해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이 벌을 받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단지 폭력적인 평가와 판단들에 신물이 났고. 너무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대화가 항상 최선의 수단인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가정 폭력 피해자가 꼭 말로 가해자를 공감하고 설득해야 할까요? 비폭력 대화는 보호를 위해 힘을 써야 하는 순간들에 대해 말합니다. 가정 폭력 피해자에게 필요한 것은 보호이고, 가장에게 종속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자원과 자유가 필요합니다. 비폭력 대화는 피해자에게 공감을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종교에서 벗어나, 서로 연대하고 보호하는 사회 구조에 대한 생각으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요즘 랑시에르라는 프랑스의 공산주의자 출신 철학자가 쓴 '무지한 스승'을 읽고 있습니다. 묘하게 로젠버그가 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교육'과 겹쳐보이는 이 책에서 랑시에르는 분할과 위계의 논리를 넘어서,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해 말합니다.
진보적이고 정의를 쫓는다는 이들조차 엘리트주의의 논리에 쉽게 빠져듭니다. 우월한 자와 열등한 자. 그래서 악인들은 멍청하고 열등한 사람이라 하고. 모르면 외우고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똑똑한 이가 멍청한 이들을 가르치고 계몽해야 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이러한 분할의 논리는 순식간에 역전됩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악과 폭력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것은 진짜 정의가 아니라고 화를 내지만. 자신은 틀릴 수 있다고 말하는 이조차, 자신은 틀리지 않았고. 저들이 악이라고 박박 우깁니다. 오늘은 트랜스젠더와 팔레스타인의 편에서 싸웠던 사람이, 내일은 동물권 운동가를 패고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게 된 것이죠.
평등은 상대주의가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랑시에르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정치가 '불화'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몫 없는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할 때. 위계와 분할의 논리를 깨트릴 때 우리는 진리를 찾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존 롤즈는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협력하며 살아가는 사회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자들의 말은 좀 공허해 보일 때도 있고, 모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비폭력 대화는 옳고 그름의 논리를 넘어 또 다른 방향에서 민주주의를, 자유와 평등을, 서로 다른 사람들의 상호의존과 협력에 대해 다시 이야기합니다. 위에서부터가 아니라, 아래에서부터의 사회 변화. 더 이상 밥을 하지 않기로 한 어머니의 이야기. 죄수와 교도관, 학생과 교장, 사장과 직원들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말이죠. 여기에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있고, 예외와 왜곡들에 저항하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저는 살면서 "너만 옳다고 생각하냐?"는 말을 참 많이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민주주의자로서, 제가 수 없이 틀려왔음을 알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쁜 사람들을 욕하고 화내기만 하면서 아무 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나약한 사람들이고. 우리는 더 많은 협력과 존중이 필요합니다. 나도 다른 사람도 이 세상도 변화로 이끌 수 있기를 바라며 비폭력 대화와 수 많은 책들을 읽습니다.
어떻게 하면 여성들의 안전에 대한 욕구와 두려움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안전을 원하는 이들에게 트랜스젠더나 외국인 범죄자를 고민하기보다, 서로 다른 이들을 환대하고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들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혐오가 아닌 사랑이라는 말은 어떻게 하면 혐오자들의 위선적인 수사를 넘어설 수 있을까요? 자신의 리스크를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자본가들에 맞서, 어떻게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생산을 통제하고 자부심을 느끼며 일을 해나갈 수 있을까요? 비폭력 대화 교육에는 여성들과 돌봄 노동자만 가득한 상황을 넘어서. 우리는 주디스 버틀러가 말하듯 '비폭력의 힘'을 느끼고, 말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남자들은 여성들의 말하기를 듣고 공감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요? 고민이고 고민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실험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을 답습해서는 변화는 없을 것 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이제 출근해야 하는 노동자이자 코치인 저는 잠 못드는 밤에 이 글을 남깁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